옛날에 대하여 마지막 왕국 시리즈 2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파스칼 키냐르, 옛날에 대하여, 문학과 지성사



1. ‘옛날’은 언어 이전의 세계이므로 언어로 설명이 불충분한, 나아가 설명이 불가능에 가까운 세계다. 태양 별 동물 인간의 생성 이전의 시원적 세계다.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마지막 왕국’을 사는 우리에게 태아의 시기인 ‘최초의 왕국’과 수태 이전의 ‘옛날’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시간에 대한 집요하고도 고집스런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저자의 『은밀한 생』을 흥미롭게 읽었다면 이 책 또한 매우 친숙하지만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 메모

- 과거(passè)는 바꿀 수 있지만 옛날(Jadis)은 바꾸지 못한다. 시대에 이어 국가, 공동체, 가족, 생김새, 우연, 즉 조건이 되는 무엇이 끊임없이 과거를 좌지우지한다. 질료, 하늘, 땅, 생명은 영원토록 옛날을 구성한다. 19쪽



- 옛날은 과거에 비해 반드시 우리가 살았던 적이 없어도 된다는 것이 첫 번째 특성이다. 옛날이 존재하는 자들의 수나 존재했던 자들의 수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계속해서 솟아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은 과거 전체보다 더 거대한 우물이다. 162쪽



- 일정한 햇수가 흐르면, 성년(盛年)은 노인으로 변한다. 노인이 더 늙은 노인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더 늙은 노인이 죽은 자가 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하지만 고대 프랑스인들이 vieillonge(최고령 노인)라 부르던 것 가운데서도 원(圓)은 완성되지 않는다. 아직도 세 가지 장례를 치러야 한다. 죽은 자가 고인이 되게 돕고, 고인이 조상이 되게 돕고, 조상이 비개인화되고 신의 질료로 환원되어 햇살 속을 떠도는 먼지를 통해 귀환할 때까지 도울 필요가 있다. 그제야 비로소 완전히 지워진 그의 이름이 갓난아기처럼 새로운 이름으로 이름의 원천에서 태어날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혼불이 나돌아 다니므로 얼굴에서 광채가 사라진다. 광채는 시간 속을 떠돌다가 다른 얼굴, 즉 갓난아기의 얼굴에 가서 닿는다. 갓난아기의 얼굴이 노인의 얼굴보다 더 쪼글쪼글한 것은 그래서이다. 40쪽



- 우리는 시각적 근원이 전무한 내면의 이미지들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에 살았고, 보기도 전에 꿈꾸었다. 대기(大氣)의 존재가 되기 전에 들었다. 호흡하기 전에 언어와 접했다. 제대로 발성하기도 전에 이름과 단어의 지배를 받았다. 단어를 분절해서 발음하고, 언어를 옹알거려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중략) 우리는 비가시적 선행성에서 움튼 새싹들이다. 31쪽



- 물고기들은 고체 상태의 물이다. 새들은 고체 상태의 바람이다. 책들은 고체 상태의 침묵이다. 48쪽



- 언어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의 집이다. 56쪽



- 겐코 법사는 시간에 관련된 두 가지 역설을 제시했다.

첫 번째 역설. 기원은 축적된다. 최초의 고대인들은 가장 최근의 사람들보다 덜 오래되었고, 옛날의 밀도도 낮다. 최근의 사람일수록 더욱 박식한 자, 더욱 전문성이 있는자, 더욱 농축된 자, 더욱 도취된 자이다. 겐코 법사는 1340년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여름을 불러들이는 것은 봄의 쇠퇴가 아니라 그보다 강력한 무엇이다. 결코 쇠하지 않는 무엇이 있다. 중단을 모르는 발아가 있다. 시작하는 것들에는 종말이 없다.” 시간은 기원에 존재하는 종말의 부재를 규정한다. 순전한 출발이다. 옛날이란 완결될 수 없는 출발이다. 51쪽



- 꿈은 부재하거나, 먼 곳에 있거나, 사라졌거나, 죽은 사람들을 이곳에 있는 것처럼 나타나게 해주는 것이다. 이곳에 있기는 하나 그들이 머무는 ‘이곳’은 공간의 차원(살아 있는 자들의 경우)도 시간의 차원(죽은 자들의 경우)도 아니다. “그는 꿈속에서 이곳에 있다.”라는 말은 시간 이전(그가 꿈속에 있으므로) 이며 공간 이전(그가 꿈속에 있으므로)의 어느 이곳을 가리킨다. 171쪽



- 속담은 시간의 내벽에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린다. 사람들이 입을 갖다대면서 차츰 언어가 벽 위에 응고되었다. 중얼거림이 반향되면서 소리의 안개가 쌓여갔다.


속담은 언어의 종유석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세계에서 흘러내린 방울이다. 19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