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2년생 김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1. 이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나와 가장 가까운 여성 두 사람을 생각했다. 82년생 김지영처럼 개띠 해에 태어난 58년 개띠 어머니, 그리고 84년생 쥐띠 아내.
어머니는 1997년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외환위기가 일어난 해부터 공장에 다니셨다. 내가 대학갈 때까지 3년만 일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 뒤까지 10년을 넘게 숨가쁘게 움직이는 공장 라인에서 에어컨 부품을 조립했다. 나와 동생이 직장을 얻고 자리를 잡을 때쯤 췌장암 판정을 받고 대수술을 받으셨다. 내가 마침 발령 대기 중이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수술 후 항암, 방사선 치료를 다녔다. 내가 서른이 넘어서까지 수험공부에 매달려 병을 얻으신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와 내가 살면서 가장 오래 서로의 곁에 있었던 몇 개월이었다. 다행히 수술 경과는 좋았고 오 년이 지났다.
아내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취직이 되어서 어린이용 수험교재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했다. 한 직장에서 일한지 십년 쯤 되어서 나를 만났고 만난 지 이년 뒤에 결혼했다. 결혼 후 일년 뒤에 아이를 가졌고 열 달 뒤에 아이를 낳았다. 지금은 출산 휴가 중이고 육 개월 쯤 더 육아휴직을 쓸 예정이지만 그 뒤로는 복직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아내는 1남 3녀의 둘째다. 예상대로 딸 딸 딸 아들 순. 본인도 인정하는 둘쨰 콤플렉스가 있다. 부모님은 장녀에 대한 너무나 컸고, 본인은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노력해도 언니보다 못한다는 소리를 귀가 아프게 듣고 자랐다. 셋째는 셋째 딸이고, 막내아들은 장손이라 대우를 받는 가정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일일이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어떤 분위기의 가정에서 성장했는지 정도는 짐작이 간다. 물론 지금은 갓난아이를 돌보느라 고민과 걱정을 고민과 걱정으로 덮고 살고 있다.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소설 같은 여성의 삶을 제3자의 입장에서 담담하게 풀어낸다. 마치 르포기사를 보는 것 같이 생생하고 세밀하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소설의 구조나 화자에 대해 더 이상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소설은 내용 자체로 힘이 있다.
내가 일하는 직장(법원)은 사기업의 근로환경과는 조금 다르다. 여성의 비율이 최근 십년 간 높아져 신규직원의 경우 남녀 비율이 반반이다. 여성직원들의 출산과 육아휴직도 자유롭고 부부 공무원도 많아 관리자부터 직원까지 최대한 배려하는 분위기다. 그래도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남자직원, 특히 미혼인 남자는 민원인을 많이 상대하거나 금전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기피부서에 배치된다. 또 남편이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경우도 많아 여성 직원들이 본인과 남편 인맥을 동원해 조금이라도 편한 부서와 보직을 맡는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내 아내나 딸이 다른 직장에서 배려 받을 수 있다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정도다. 사기업도 공무원 조직처럼 여성들이 법적으로 보장된 출산과 육아에 대한 권리는 부담 없이 누릴 수 있도록 사내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계속 주장하고 요구해야 그 시기가 조금이라도 앞당겨질 듯 하다.
- “아,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중략) 아무래도 그 선배의 목소리가 맞았다. 취했을 수도 있고, 쑥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친구들이 괜한 짓을 할까 봐 더 과격하게 말했을 수도 있다. (중략) 일상에서 대체로 합리적이고 멀쩡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도, 심지어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에 대해서도, 저렇게 막말을 하는구나. 나는, 씹다 버린 껌이구나. 93쪽
- 김지영 씨는 눈을 조금 더 낮추고, 또 조금 더 낮춰 가면서 계속 입사 지원서를 냈고, 절망적인 와중에 남자 친구가 생겼다. 언니에게만 살짝 말했는데, 언니는 잠시 김지영 씨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는 이 상황에 마음이 생기니? 감정이 생겨? 너도 대단하다.”
김지영 씨는 그러게, 하면서 웃어 넘겼다. 사귀던 연인들도 헤어질 판에 새로운 사람이 좋아진 건 사실이고, 달리 대꾸 할 말도 없었다. 창 너머로 이른 눈발이 흩날렸고, 오래전 읽었던 시가 떠올랐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달빛이 새파랗게 쏟아지는데······. 1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