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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94
서효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평점 :
1. 2015년 여름휴가 떄 전주를 찾았었다. 내리쬐는 햇볕과 한옥마을을 꽉꽉 채운 사람들의 행렬이 숨막히던 전주. 『혼불』의 작가 '최명희문학관'을 방문했었다. 마침 느린 우체통 이벤트가 있어서 엽서 한 장을 써서 집으로 보냈다. 정확히 일 년 뒤에 도착했다.
서효인의 세 번째 시집 『여수』는 '느린 우체통'이다. 두 권의 시집에서 보여준 당돌함이나 시니컬한 정서는 많이 순화되었지만 우리가 잊고 있었던 시간과 장소, 그때 거기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시인이 몸에 심어 놓은 빨간 우체통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가 불특정 다수를 향해 보낸다.
시집의 제목은 대부분 전국 각지의 지명이고, 시편마다 그곳의 특징과 개인적인 사연이 언급되고 있지만 어떤 제목을 붙여도 어울릴 것 같은 시들이다. 더불어 내가 자란 곳과 내가 가본 곳과 가보고 싶은 곳에 대해, 누구와 가면 좋을까 생각하게 하는 시집이다.
흰 빨래는 내어놓질 못했다/ 너의 얼굴을 생각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있었다//
도처에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른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기를 바라며 걸음의 볼륨을 높인다. (···)// 동물보다 산업보다 무서운 인간의 직립, 걸어 떠난 당신은 지금 지구 바깥에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의 공포는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번화가의 가나 사람을 껴안는다. 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떄부터 우리는 최대한의 보폭으로 살아왔고 여기에 이르렀다.//
강릉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우리가 게으르기 떄문이었지. 게으름을 사랑하자고 오징어들이 말한다. (···) 어디든 끝이 보이는 곳에 가닿고 싶었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고 성질머리가 차가운 이곳의 산맥은 품고 있던 눈을 오래 참은 울음처럼 쏟아냈다. (···) 파도가 거품을 내고 거품을 업은 파도가 다시 거품을 덮는다. 끝 속의 끝에서 다른 끝이 나타난다.
허우대 빈약한 그들 뒤로 아랫입술을 비쭉 내민 너를 보았을 때, 나는// 아가를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비밀로 하는 편이 좋겠다./ 신입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맞이한다./ 너를 사랑했던 마음으로 마음에 더러운 연못을 만든다.// 캠퍼스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못 너머에/ 너는 아랫입술이 약간 돌출해 있었고/ 나는 가장 빠른 뜀박질로 연못을 끼고 돌아 너에게 가지만/ 연못이 자꾸 거대해졌다. 생일의 용기를 자랑하는 자들이/ (···)// 연못에 들어가기로 한 건/ 입술 때문만은 아니다./ 입술은 살 밖으로 노출된 심장이다. 너의 심장을 핥으며// 나는 아가를 생각했다.// 너의 아가가 되고 싶어서 연못을 돈다./ 몸에 물을 묻히기 시작한다./ 병든 엄지발가락부터 연못에 담근다./ 네 입에 들어가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 난 좀더 부드러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