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시인선 90
허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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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은실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1. 발목의 표정을 생각해 보았다.



그루터기에 앉아/부어오르는 저녁을 본다// 숨어 울다가/햇살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지문도 발자국도 없는/강의 얼굴// 턱밑까지 차오른 숨은/가라앉았지만/눈물이 발목을 붙잡는다// 젖은 운동화 끈을/ 그루터기에 칭칭 감고// 저 흐르는 얼굴 속으로 들어가/ 뒤꿈치를 살짝 들고// 숨을 참는 순간과/ 거두는/ 그 풍부한// 경계의 표정을 지나야/ 건너 마을에 다다를 텐데// 발목의 뿌리는/ 여전히 깊다



2. 허은실 시인의 첫 시집. 손등으로 밀가루 반죽을 꾹꾹 눌러 뽑아낸 가늘고 긴 가락에, 따뜻한 육수를 붓고 약간의 고명을 얹은 엄마표 국수가 생각난다. 시인은 ‘확장’보다는 ‘응축’의 방식으로 최대한 절제하며 발설하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망설이며 삼키는 말들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 울대가 출렁거리는 모습. 눈물은 흐를 때보다 삼킬 때가 더 슬프다.



시의 종류를 거칠게 서정, 이미지, 리얼리티로 나누어 보면 여성성을 1, 2, 3부는 서정이 주를 이루고 4부에서는 리얼리티가 강한 현실비판적 시가 많다. 시인이 평소에 가졌던 인식을 4부에서는 당차게 쏟아내고 있다. 국수만 먹으면 한두 숟갈 나물비빔밥이 생각나는데 4부가 맛보기 비빔밥처럼 흥미롭다.



* 메모



- 이별하는 사람들의 가정식 백반, 16-17쪽 부분

아비는 춘궁이었네/ 기별 없이 찾아온 딸에게/ 원추리를 끊어다 무쳤네// 풋것은 오래 주무르면 맛이 안 나지// 꽃들에게 뿌리란 얼마나 먼가/ 이 맛은 수몰된 마을의 먼 이름 같아요// 아비는 오래 얼려둔 고등어 한 손을 내었네/ 고등어는 너무 비린 생선이에요/ 잡히면 바로 죽어버린다구요// 비린 날엔 소금으로 창자를 닦거라// 그런데 아버지 기일에 왜/ 미역국을 끓이셨나요// 너를 좋아하다가 죽은 남자가 있다는구나/ 새 옷을 지어다 태워주었다// 세상에 미역처럼 무서운 것이 있을까/ 한 줌이었던 것이 이토록/ 방안에 가득하잖아요// (후략)




- 윤삼월 26-27쪽 부분

노인들은 화투점을 본다// 매화 벚꽃 낭창하니/ 부음이 들려오기 좋은 날이다// 햇빛에서는/ 개 꼬실르는 냄새// 치매에 걸린 가지들 아래// 배드민턴 흰 공이/ 하늘을 잡았다 놓는다// 피어 조화가 되는 꽃들/ 산 채 묻힌것들의 눈빛을 닮는다/ 죽은 아이들이 뜬 눈으로 태어나 휘둥그레하다//





- 입덧 50-51쪽 부분

익숙하던 것들이 먼저 배반하지/ 그러므로 어느 날/ 밤냄새를 견딜 수 없게 되는 것/ 너의 멜로디를 참을 수 없게 되는 것// 검은 행에 변종의 언어가 파종될 때/ 냉동실에는 수상한 냄새들/ 친밀한 너를 혐오한다// (중략)// 별을 낳기 위해/ 중력을 거부해야 하므로/ 소화되지 않은 말이/ 밑구녕이 거꾸로/ 치밀어올라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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