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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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문학동네




1. 그는 기자 출신 소설가다. 소셜(social) 작가다. 현실의 웅덩이를 돌아가지 않고 신발이 젖든 말든 그 속으로 들어가 온몸으로 깊이를 잰다. 너무나 현실적이기에 SF같은 그의 소설을, 소설 속 인물들의 얼룩을 읽어나갔다.



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같은 반 친구를 살해한 남자, 학습만화 편집을 하는 남자의 여자친구인 여자 그리고 가해자의 어머니. 학교폭력이라는 친숙해져버린(?) 주제가 설득력 있게 다가온 이유가 무엇일까. 작가가 어느 누구도 선인이나 악인으로 단정 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학교 폭력의 피해자이지만 엄연히 살인자인 남자 주인공, ‘보람’이라는 이름 같지 않게 어떤 일에서도 보람을 찾지 못한 여자, 자신의 아들은 폭력의 가해자가 아니며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수년을 남자 주위를 스토킹하는 가해자의 어머니. 그 세 꼭짓점이 이루어낸 삼각뿔 안에 ‘우주 알(cosmic egg)’이라는 SF적인 존재가 옮겨 다니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믐’. 아침 일찍 동쪽 하늘에서 잠깐 볼 수 있는 희미한 존재. ‘그믐’은 낮달과 이란성 쌍둥이가 아닐까. ‘그름’, 하고 입술이 다물어질 때 입꼬리에서 살짝 묻어나오는 울음을 품은 그믐달의 입장으로 이 소설을 읽었다.



*메모


- 인간이라는 건 결국 패턴이야. 남자가 설명했다. 앞에는 새장을, 뒤에는 새를 그린 부채를 상상해봐. 부채를 빠르게 돌리면 새장 속에 갇힌 새가 생겨. 신경회로 위에 의식이 떠오르는 과정도 그와 비슷해. 전기신호들이 회로 속을 빠르게 다니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불쑥, 유령처럼. 밤거리의 네온사인들이 제각각 깜빡이다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동시에 켜지고는, 그다음부터 함께 점멸하는 광경을 상상해봐.
인간 의사들이 만들어낸 약은 패턴을 없애는 게 아니라, 패턴 속을 돌아다니는 전기신호를 느리게 할 뿐이었다. 물이 천천히 흐르면 강이 범람하지 않을 거라는 식이었다. 소년은 이미 사람을 온전히 죽여본 자의 본능으로 자신 안의 패턴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8-9쪽



- 우주에는 시작이 없어. 남자가 대답했다. 우주는 마치 볼펜과 같은 거야. 그냥 하나의 덩어리야. 볼펜은 길쭉하게 생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볼펜에 양끝이 있다고 말하지. 하지만 사실은 볼펜이 공기와 닿는 모든 면이 다 볼펜의 끝이야. 그 모든 접점에서 볼펜이 시작하고 끝나는 거야. 우주도 비슷해. 시공간연속체가 무無와 만나는 지점이 있지. 거기서 우주는 시작하고 끝나. 그 안쪽에는 우주 알이 있어. 그 바깥 쪽에는 우주 알이 없고. 10쪽



- 그믐이라 그래. 그믐달은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거든. 그래서 쉽게 볼 수 없지. 해가 뜨기 직전에만 잠깐 볼 수 있어. 남자가 말했다. 낮에는 너무 가느다랗고 빛이 희미해서 볼 수가 없어. 140쪽

저녁에 가느다란 달 몇 번 본 거 같은데. 해가 막 지려고 할 때.

그건 초승달이야. 초승달도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지만 그믐달이랑 미묘하게 뜨는 시각이 달라. 초승달은 해가 뜬 다음에 떠서, 해가 지고 나서 조금 있다가 져. 그때 볼 수 있는 거지. 그믐달은 해가 지기 전에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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