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허수경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 미술관에서 ‘Ice Watch'라는 비디오 클립을 보았었다.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도심의 시청 광장에 시계 모양으로 놓고 몇몇의 무용수가 시계처럼 돌아가면서 춤을 췄다. https://youtu.be/1CEP_eg8WKY

오랜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추억으로 몸속에 축적된다. 기억은 바람과 망각에 의해 비틀리고 뒤틀려 깊숙이 자리 잡는다. 노래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길을 걷다가 특정 장면이나 단어를 만나면 그 기억이 몸 밖으로 튀어나와 문장이 되고 시가 된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추체험(椎體驗)의 과정이 다르기에 결과물도 제각각이다.


2. 고향인 진주를 떠나 독일에서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시인. 삶의 이력 자체가 한 편의 시다. 평소에는 못 느껴도 떠나면 그리운 것들. 자꾸만 생각나는 것들. 먹고 싶은 것들. 이 시집은 그 오래된 기억들을 소환한다.



* 메모



- 빙하기의 역 111-113쪽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 간호사는 천진하게 말했지/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죽은 사람보다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손들이 더 많대요 뼈만 남은 손을 감싸며 흐느끼던 손요// 왜 나는 너에게 그 사이에 아무 기별을 넣지 못했을까?//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라서/ 누구에게든/ 누구를 위해서든// 하지만/ 무언가, 언젠가, 있던 자리라는 건, 정말 고요한 연 같구나 중얼거리는 말을 다 들어주니//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 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네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



- 포도나무를 태우며 20-21쪽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




- 우연한 감염 58-59쪽 부분

태어난 시간 59분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0시 사이, 미쳐버릴 것 같은 망설임으로 가득 찬 60초 속에는 태어나기 직전 태아와 사라지기 직전의 태아가 서성거리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