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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내용 ㅣ 창비시선 329
조정인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평점 :
1. 새빨간 거짓말이 탄로 나면 사과를 건넨다 새빨간 입술자국이 묻은 날에 교회로 간다 주말의 흰자위를 붉게 물들이는 사과 일요일은 연소 중이다 남은 불씨가 바닥에 떨어진다
교회에서 돌아와 미용실로 향한다 몇 년째 내 머리를 잘라주던 써니는 볕을 찾아 여수로 내려갔다 그동안 잘려나간 머리카락들은 어디로 갔을까
하얀 종이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이 찬송가처럼 퍼진다 새빨간 장미 한 송이를 꽃병에 꽂는다 그 꽃이 발화점이 되어 타오른 불꽃은 뾰족한 심장을 앞세우고 새빨간 망토를 향해 돌진한다
새빨간 사과의 등에 칼이 꽂힌다 사람들은 웃으며 샛노랗게 변한 사과를 받아들인다
2. 등단의 기회를 주신 조정인 시인의 시집. 곧 시인을 뵙는 자리가 있기에 감사와 약간의 의무감으로 시집을 읽었다.
“박동민 「사춘기의 배꼽」 외 10편은 성장통을 겪는 사춘기 과정에서 ‘N포기시대’라 지칭되는 이 시대 청춘들의 암울한 표상까지를 발랄한 화법으로 예민하게 짚어냈다. 상황을 전개해 가는 서사의 근육도 탄탄했으며 무엇보다 재미있게 읽힌다는 장점을 가졌다. 앞으로 활달하고 개성적인 그만의 시 세계를 열어 갈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더욱 정제되고 내밀한 문장에 대한 고민은 그에게 남은 과제일 것이다.” (2017년 시산맥 봄호 중에서)
시인이 숙제로 남겨주신 “정제되고 내밀한 문장”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시집의 곳곳에 담겨 있다. 이 시집의 키워드는 ‘사과, 장미, 신(神)’. 특히 시적 주체가 바라보는 시야가 아주 조그마한 씨앗에서부터 우주까지 광범위하면서도 그 사이에 여성성, 신앙, 존재에 대한 깊은 사색과 성찰이 담긴 정제된 문장이 담겨 있었다.
말의 수면 아래에는 극지와 극지를 잇는 레일이 있다// 말과 말이 어긋나 레일이 끊긴 날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바람이 낸 길, 크레바스 깊은 골은 만년설의 마음이며 봉인된 입/ 마음이 밀리고 밀린 단애 밑으로 사랑해, 짧은 말마디가 뛰어내리면 뒤이어/ 쩌렁쩌렁 설산이 무너진다 누구에겐들 극지를 뒤흔드는/ 설원의 고함소리를 듣는 밤이 없었겠니// (···)// 멀고 쓸쓸한 극지에서 태어난, 그보다 훨씬 먼 행성에서 날아온 씨앗에서 움튼/ 사랑해, 라는 말에는 얼마나 자주 마음이 다녀가는지// 당신과 내가 투숙하는 이쪽과 저쪽, 극지와 극지 사이 아득하게 레일이 놓였고/ 하루치 쓸쓸한 바람을 적재한 그날의 화물열차가 협곡을 지나간다
젖은 얼굴을 반씩 나누어가졌으면 하던 때가 있었다// 사과가 사무친다 칼날에 대한 사과의 감정이 그렇다, 씨방 쪽으로/ 깔끝을 숙여 천천히 갈날을 앉혔다 씨앗의 방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사과조각 배열마저 당신이 구심이라니! 사과는 물기가 많다// (···)
팔을 뻗었다 3개월짜리 계약직은 절대로 넘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건/ 고립된 조난처럼 외로운 일이니까// (···) 어어, 하는 사이 중력을 제어하는 큰 손바닥이 다가와/ 몸의 기울기를 받아안았다 지구와 함께 탱고를! 지구 자전에 스텝 맞출 때/(···)// 나는 전신으로 반응했다, 그러므로 존재했다// 지구의 짧은 턱수염에 왼쪽 뺨이 스쳤을 뿐 넘어진 건 아니다/ 옆구리를 치고 들어온 허방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곳은/ 사막의 모판,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막을 분양받아 키운다/ (···)
울긋불긋 웃는 얼굴이 가면을 쳐드는 일어었다 만발한 가면들/ 사이 내 얼굴을 가만히 내렸다 눈물이 한 점 피어올랐다// 씨앗 하나 움트는 정도 사소한 균열, 그것은 내부 어딘가 금 가는 것에서 시작돼/ 막장을 빠져나가는 탄차처럼 덜컹거린다, 생애 한두번은/ 전기충격을 가한 것처럼 격렬하게 덜컥거린다// (···) 파랑주의보 미간을 지난다 수평선이 펄럭인다 바다를 엎지른/ 너는 고개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