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집배원 나희덕의 유리병 편지
나희덕 지음, 신철 그림 / 나라말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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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글, 신철 그림, 문학집배원 나희덕의 유리병 편지, 나라말


1. 사람마다 수건을 접는 방식이 다르듯 역사도 시도 사람마다 다르다 역사와 예술은 틀린그림 찾기가 아니라 숨은 그림 찾기 먼지가 수북이 쌓인 빛바랜 책 세로쓰기로 된 책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하는 책 같은 젖은 수건 같은 역사


수건은 돌고 돈다 등 뒤에 숨겨왔던 마음을 놓고 냅다 뛰던 아이의 신발이 벗겨지고 쫓아오던 수건에게 붙잡혀도 웃는다 부끄러워 빠진 이빨이 부끄러워 얼른 자리를 채운다


할아버지 칠순 잔칫날 색동옷을 입고 춤추던 아들과 하나도 안 변한 동창들의 얼굴을 새겨 넣은 수건 삶아도 삶아도 냄새가 나고 삶아도 삶아도 지워지지 않는 눈물자국의 끄트머리를 잡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야 했던, 퉁퉁 부은 얼굴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어 사각의 링 안으로 수건을 던져야 했던 역사



하늘을 물들이는 형형색색의 수건들과 자식 같은 이태리 타올
누군가를 잊으려고 손사래를 치는 동안 당신의 영혼은 부단히 헹구어진다
바닷바람에 말라가는 미역처럼 단단해진다
눈 빠지게 기다려도 눈은 빠지지 않고 눈에 밟히는 것들만 생생한 수건의 역사



젖고 마르고 젓다가 말다가 너덜더덜해진 수건의 역사를 새로 쓰기로 한다
저녁을 먹고 수건을 개킨다 차곡차곡 서랍을 쌓는다 쏟아진 하품이 쌓인다



2.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학집배원 나희덕의 시배달’을 단행본으로 묶은 책이다. 맨 뒤편의 작품 출전을 보니 2007년-2009년에 출간된 시인들의 시들이 상당수다. 시 소개와 여덟 아홉 줄 정도의 시인의 감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편마다 그림이 있고 실린 시들도 부담 없이 읽기에 좋은 시들이다.




* 메모


- 김선우, 〈낙화, 첫사랑〉, 36쪽 부분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 장옥관, 공기예찬 64-65쪽 부분

공으로 얻은 공기 채운 마음/ 공처럼 둥글어져서/ 푸들푸들 가로수가 강아지처럼 마냥 까부는데/ 페달 밟으니 바퀴 버팅기고 있던 살대가 모조리 지워지고 동그라미 두 개만 떠오른다/ (···)

- 김혜순, 첫, 76-77쪽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 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 버리고 싶어./ 나는 당신의 얼굴, 그 속의 무엇을 질투하지?/ 무엇이 무엇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당신을 만든 당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 (···)



- 문정희, “응”, 116-117쪽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164쪽 부분

푸른색. 떄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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