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좋은 책 - 포개지고 번져가는 이야기들
김행숙 지음, 조성흠 그림 / 난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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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사랑하기 좋은 책, 난다
#김행숙


1. 김행숙 시인의 독특한 산문집. 안데르센의 동화《인어공주》의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사랑에 관한 소설과 시, 철학, 그리스 로마신화, 영화를 재료로 사랑에 관해 쓴 한 편의 소설 같은 철학책 같은 서평집 같은 시집 같은 책.

물이 반쯤 있는 비커에 ‘사랑’ 한 방울 떨어뜨렸을 뿐인데 사랑은 물속으로 번져가며 독특한 색깔과 향기를 보이고 풍긴다. 책은 얇지만 그 밀도가 높아 자꾸만 다른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나는 왜 이 책을 읽고 한국 남자와 이란 여자의 사랑 얘기를 쓰게 됐을까.




2. 한국 남자와 이란 여자가 사랑을 했다. 유라시아와 페르시아의 기후만큼이나 둘은 참 달랐다. 여자는 콧대가 높다. 문자 그대로 콧대가 높아 여자는 코를 낮추는 성형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 남자는 모음탈락이 심한 페르시아어를 열심히 배웠다. 그녀의 코와 그의 발음은 어색하고 서툴렀다.


그는 테헤란로에서 일한다. 콧대 높은 빌딩 위로 구름이 지나간다. 그는 하늘을 보며 카스피해를 건너온 푸른 바람과 푸른 그늘, 푸른 침묵의 부력으로 떠오르는 이슬람 사원, 포플러 나무그늘 아래에서 속삭이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는 여전히 비키니 보다 부르키니를 사랑하고 이란의 스키장과 함성으로 가득찬 아자디 스타디움을 동경한다.



어둠에도 색이 있다. 꿈속에서 그녀는 매일 다른 히잡을 쓰고 나왔다. 그녀의 이름을 딴 골목이 이 도시에 있으면 좋겠다. 그녀를 위해 그는 세이렌의 노래를 닮은 시를 썼다.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이름이 같은 비를 맞으며/ 비에 젖은 책과/ 비는 피했지만 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저만치 날아가는 우산과 뒤집힌 치마를 만난 적이 있다/
한쪽 눈만 깜빡이는 형광등 아래/ 해독할 수 없었던 너의/ 뭉개진 글자 같은 비밀의 페이지는 넘기고/ 다른 것을 틀리다고 생각했던 나의/ 빌미의 귀퉁이를 접어둔다/ 비가 오는 밤이면 벽에 박힌 못의 대가리로 숫자들이 무게중심을 옮기기 시작한다/ 이름만 같았던 소녀가 다른 도시로 건너오고 있다.”




3. 메모


- 내게 할머니는 사랑스럽고 유쾌한 노인이었다. 나는 신랄한 어마하고 있을 떄보다 유쾌한 할머니하고 있을 떄가 훨씬 마음이 가볍고 좋았다. (···) 어쨌든 엄마가 내게 시니컬한 평론이라면 할머니는 농담으로 버무린 소설에 가깝다. 11쪽

- 3월의 잔설같이 연약한 육체에 남아 있던 마지막 힘으로 할머니는 눈을 감았다. (···) 그 순간, 내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녀의 쭈글쭈글하고 검버섯이 핀 피부 위로 비늘들이 돋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무지갯빛 비늘들이 할머니의 죽은 몸을 반짝이게 했다. 불가능한 광경이었다. 그것은 슬픔 너머에서 펼쳐지는 미지의 풍경이었다. 12쪽



- 나는 소설(샤오루 궈의 소설,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사전)을 읽는 내내 Z의 서툰 언어가 매우 적절할 뿐 아니라 매력적이라고까지 느꼈는데 그래서, 사랑의 언어는 본래 서툰 언어가 아닐까, 외국어가 사랑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었다. 49쪽



- 김화영 선생님의 「책, 독서, 교육」이라는 에세이에 보관되어 있는 짧은 연애편지.

나는 문맹의 성인들을 모아놓고 이른바 ‘영희와 바둑이 철학’을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되었다. (···) 글자를 깨치는 것이 느린 피교육자들은 가령 고향에 있는 자신의 아내에게서 편지가 오면 나에게 그 편지의 내용을 읽어달라고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사정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부부 사이의 가장 내밀한 마음의 표현을 제3자를 통해서 해독해야 하는 딱한 사정에 내가 참여한 것이다. 하루는 봉투 속에서 편지를 꺼냈더니 백지 위해 손바닥을 펴서 짚은 채 각 손가락의 윤곽을 따라 연필로 서투르게 줄을 그은 손의 그림이 커다랗게 떠올랐다. 그 밑에는 어렵사리 판독한 결과 ‘저의 손이어요. 만져 주어요.’라는 뜻으로 읽혀지는 애틋한 글이 딱 한 줄 씌어져 있었다.



- ‘괜찮다’가 사랑의 서술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사랑의 접속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는 사랑의 문법이다. 96쪽



- 사랑은 ‘액체적’이다. 녹이고, 빠뜨리고, 섞이고, 끓고, 합쳐지고, 흐르고, 퍼지고, 스미고, 나눠지고, 증발하는 그 모든 액체적 현상이 사랑의 다양한 모양새이자 속성이다. 눈물은 사랑의 액체 중의 액체가 아닐는지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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