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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단어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93
유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평점 :
- 유희경 시집, 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사
1. 나의 ‘오늘 아침 단어’를 보기 위해 폰 메모장을 펼친다. ‘도어락, 잘못된 비밀번호, 골목’ 아마도 샤워 하다가 생각난 단어를 재빨리 메모해 놓은 듯. 왜 그런 단어를 적어 놓았는지 나도 모른다.
막다른 골목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짝다리를 짚고 나를 쏘아보는 밤.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 죽어라 집으로 뛰어갔는데 복도식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는 왜 16층에서 내려오지 않을까. 미치겠다. 겨우겨우 어찌어찌 6층 집 앞에서 도어락을 열고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눌렀는데 자꾸 오류가 난다. 분명 골목은 내 뒤를 쫓아오고 있을 텐데. 꿈속의 단어였나 보다. 이상의 시처럼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의 꿈을 꾸었던 걸까.
2. 유희경의 시는 슬프지만 유머가 있어 아프지 않다. 인기척을 듣고 이중의 자물쇠를 채우는 이웃이 아니라 문을 열고 내 손목을 안으로 끌어 당겨줄 것 같은 가족처럼 포근하다. 나처럼, 당신처럼 어긋난 사랑에 아파하고, 매번 실패하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후회하고 그래도 미래에는 이럴지도 몰라, 라며 막연한 기대를 하는 주체와 수시로 만나게 된다. 현실 없이 지극히 현실적인 시, 화이트보드에 남은 희미한 마커처럼 잔상에 남는 시 그리고 ‘내일 아침 단어’가 있어 겨우 눈 감을 수 있는 오늘 밤.
잠든 것들이 거리로 나갔다/ 긴 소매들은 소매를 접었다// 입김이 남이 있는 창문/ 불이 꺼지지 않는 들판/ 날아오르는 바람과/ 걸어다니는 발자국들// 가슴만 한 신음을 낳고/ 누군가 밤새 울었다//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안겨 있는 나를 보았다/ 하얗게 빛이 났다/ 나머지는 어두웠으므로// 비명 같은 내가/ 빈 종이 되었다
옆에 선 여자아이에게 몰래, 아는 이름을 붙인다 (···) 버스가 기울 때마다 비스듬히 어깨에 닿곤 하는 기척을 이처럼 사랑해도 될는지 (···) 그 얘에게 붙여준 이름은 珉이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아득한 오후만 떠오르고 이름의 주인은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의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사람이다 당신 발밑으로 가라앉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이다 (···) 당신은 내 오른쪽의 사람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도는 사람이다 내 머리 위에 흔들리는 이가 있다면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그토록 나를 지우는 사람이다
한낮의 태양이 가득했다 산책이 시작되었다 너는 저음의 걸음을 이끌고 그곳까지 걸어갔을 것이다 (···) 그날 밤은 떠올리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낱장의 시간들이 날려 오고 손끝의 힘이 풀려나갈 때 오후의 개가 너를 따라온다 (···) 지금은 그저 假定의 시간 이제 사람들은 창문의 한 귀퉁이를 발견할 것이다 (···)
눈 덮인 지붕과/ 궁핍의 나무를 떼어낸다/ 서러운 그림이다// 그림의 그의 것이다/ 그가 직접 걸어둔 것이다/ 등 너머 실팍한 마음이/ 이제야 먼지처럼 날린다// 거실 옆 부엌에는/ 그릇을 깨먹은 여자가 있다/ 잔소리하듯 하얀/ 그릇됨의 속살// 떼어낸 자리가 환하다/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없어진 나날보다/ 있었던 나날이 더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