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의미 민음의 시 169
김행숙 지음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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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시집, 타인의 의미, 민음사
#김행숙



1. 소년이 평균대에 폴짝 뛰어 오른다 양팔을 벌리고 일자걸음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팔자걸음이나 갈지(之)자로 걷는 자는 환영받지 못하는 길 최초의 도약보다는 침묵의 호흡과 균형이 우선인 길 달리기가 소용없는 길



발끝에 힘을 주고 점자책을 읽듯 점들을 짚어 나간다 당신의 손을 잡고 어깨를 짚고 걸었던 철길이 보인다 길은 걸으면서 점점 길이 든다 걸을 때마다 새로운 길이 든다 오르막은 허벅지의 깡으로 내리막은 무릎의 악으로 들어주고 덜어주고 붙잡아주는 버팀목 당신



발에는 티눈이 있어 길은 밝다 발은 물집을 짓는다 까치발로 겹질리고 진창에 빠지고 길은 꼬이고 다시 양팔을 벌리고 발목을 세우고 자세를 잡는다 호흡과 리듬을 유지한다 짧은 순간 나무를 생각한다 생각은 가지를 치고 가지를 뻗고 나만의 이정표를 위해 나뭇가지를 꺾고 바위에 그림을 그리고 이름 모를 무덤 앞에서 눈을 감고 흐르는 시냇물에 이름을 쓴다



한번 앉았다 하면 일어날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외줄타기를 가르치자
동기와 목적의 끄덕이 대신 무중력 상태의 뚜벅이가 되자
“보행자는 결코 도착하지 않는다. 늘 지날 뿐이다.”
매일 무수한 발길이 이곳을 지나갔다 깨진 유리조각을 지르밟아도 찢어지지 않는
무수한 불길을 걷어차는 발길질로 결기를 보이는 당신



깔끔한 착지와 그 순간 녹아버린 발
저울은 여전히 양팔을 벌려 가까이 다가와 나를 꼬옥 포옹한다





* 메모

- 포옹, 13쪽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가까이.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매우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 타인의 의미, 26쪽

살갗이 따가워./ 햇빛처럼/ 네 눈빛은 아주 먼 곳으로 출발한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뒤돌아볼 수 없는/ 햇빛처럼/ 쉴 수 없는 여행에서 어느 저녁/ 타인의 살갗에서/ 모래 한 줌을 쥐고 한없이 너의 손가락이 길어질 때// 모래 한 줌이 흩어지는 동안/ 나는 살갗이 따까워.// 서 있는 얼굴이 앉을 때/ 누울 때/ 구김살 속에서 타인의 살갗이 일어나는 순간에



- 목의 위치, 14-15쪽 부분

목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문득, 세상에서 가장 긴 식도를 갖고 싶다고 쓴 어떤 미식가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식도가 길면 긴 만큼 음식이 주는 황홀은 천천히 가라앉을까요, 천천히 떠나는 풍경은 고통을 가늘게 늘리는 걸까요,




- 밤입니다, 20-21쪽 부분

눈을 떴는데, 눈을 감았을 때와 같은 어둠!/ 당신의 몸은 없고 당신의 목소리만 있습니다. 부엉이는 부엉이의 눈빛만 허공에 떠 있습니다./ (···)/ 나는 부엉이의 약간 구부러진 발톱을 상상합니다.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있는 보이지 않는 발톱에 대하여. 보이지 않는 발톱에 물려 죽은 보이지 않는 쥐에 대하여./ (···)



- 말굽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 78-79쪽

뒷굽에서 앞굽으로 피어나는 이야기/ 앞발과 뒷발이 섞일 때/ 커브에서/ 트랙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요/ 신사초등학교 6학년 8반// 또는 3월 31일/ 내 키는 자라는 걸 그만뒀습니다/ 센티미터, 밀리미터, 또 다른 눈금들, 이를테면 온도계의/ 당신이, 연속적인 당신이 키가 큰 사람으로 성장할 때// 당신이 저 위에서 머리를 떨어뜨리고 나를 찾을 때/ 여보세요··· 여보세요···/ 목소리는 뚜 뚜 작아집니다/ 나는 곰곰 생각했습니다// 말을 타고 떠난 자들에 대하여/ 다음 해 꽃이 돌아오는 봄-나무에 대하여/ 다음 해에 죽는 일년-초에 대하여/ 알맞은 키에 대하여// 어깨를 움츠릴 때 목이 없어지고/ 등을 구부릴 때/ 사리진 키를······/ 나는 힘껏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새빨개지도록/ 성난 神처럼/ 수단과 목적의 무한한 근접// 단 하나의 뿔이 되는 시간, 채찍처럼 긴 시간, 현재적인/ 현재는 흙먼지에 싸여/ 앞과 뒤가 없지 않겠습니까



- 귀 82쪽

빗소리를 좋아하고 어둠을 좋아하는······ 너는 소경처럼 간절하게 허공을 두드린다.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돼.// 빗소리와 빗소리 아닌 소리를 듣고 있다. 가까운 곳에서 유리창이 깨졌다.// 바닥이 떨어진 유리 조각을 부시는 커다란 발이 있다. 쿵 쿵 걸어 나가고 싶은 두 개의 발이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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