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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3편 중편 연작소설을 다 읽고 각 편마다 머릿속에 남는 이미지가 있다. 〈채식주의자〉에서 ‘헛간 속의 피웅덩이, 거기 비친 (영혜의) 얼굴’ 〈몽고반점〉에서 영혜의 형부이자 비디오 작가인 ‘나’ 처제의 몸에 꽃을 그리고 나신을 카메라에 담는 장면, 〈나무 불꽃〉에서는 ‘나’(영혜의 언니)가 병원의 소란으로 피투성이가 된 동생을 싣고 가는 자동차 장면.
여자 주인공의 식물성이라는 공통적인 이미지를 축으로, 각 편의 화자가 달라(영혜의 남편, 영혜의 형부, 영혜의 언니) 각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입체감이 느껴졌고, 문장은 시적이다.
알라딘 후기를 보니 서평으로 유명한 ‘로쟈’님이 ‘개연성은 있지만 핍진성이 약하다’는 말을 인용하며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를 하셨는데 나는 꼭 소설이 현실적이고 기시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혜’가 왜 고기를 거부하는지에 대해 소설은 친절하지 않다. 어릴 적 자기를 물은 개가 끔찍하게 죽어가는 과정 때문인지, 꿈 때문이라면 왜 그런 꿈을 자꾸만 꾸게 되는지 불분명하다. 딱 떨어지거나 독자가 그럴듯하게 추론할 수 있는 이유나 힌트가 없어도 소설은 충분히 훌륭하다. 실제 현실에서 이해할 수 없이 그로테스트한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기에 소설은 나한테는 핍진적이었다.
- 내가 믿는 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43쪽
- 나는 아내의 움켜쥔 오른손을 펼쳤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 있던 새 한 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65쪽
- 그러나 아내의 무엇인가가 그의 취향을 살짝 비껴가 있음을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목구비며 체격이며 사려깊은 성격까지 오래전부터 그가 찾아온 여자의 이미지였는데, 무엇이 부족하게 느껴지는지 딱히 짚어내지 못한 채 그는 결혼을 결심했다. 정확이 그것이 무엇인지 안 것은 처음 처제를 소개받은 가족모임에서였다.
처제의 외꺼풀 눈, 아내 같은 비음이 섞이지 않은, 다소 투박하나 정직한 목소리, 수수한 옷차림과 중성적으로 튀어나온 광대뼈까지 모두 그의 마음에 들었다. 아내와 비교한다면 훨씬 못생겼다고도 할 수 있는 처제의 모습에서, 가지를 치지 않은 야생의 나무 같은 힘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때부터 처제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78쪽
-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1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