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문학과지성 시인선 486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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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시집,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문학과지성사, 2016




1. 이 시집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영원회귀’였다. 이 시집에 동명의 시가 있고, 시집 제목에도 ‘영원’이라는 단어가 있다.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해
1) 허무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식이라거나, 2) 시간은 늘 새로운 사건을 발생시킨다는 그 사실일 변함없이 반복된다거나, 3) 생성의 상태, 즉 힘에의 의지들의 힘겨루기 상태가 영원회 반복된다는 등 수많은 해석이 있지만, 적어도 ‘삶의 단순한 반복이 영원회귀는 아니다.’는 것에는 일치한다.


‘오늘 아침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얼음처럼」)
‘당신에겐 매일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생기고/나는 자꾸 일치하는 밤’ ‘리드미컬하게 다가오는 건 언제나/가까운 곳과 먼 곳이 바뀐다는 뜻/이제 가능해진다는 뜻’(「음악에게 요구할 수 있나」)


-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오늘 아침’이 오늘이 끝나면 ‘오늘 아침’이 아닌 ‘내일 아침’이 된다. 변화에 대한 감각하든 무감각하든 시공간은 변화하고 있고, 변화하는 시공간 속에 가능성이 태어난다는 뜻으로 읽었다.



2. 변화의 가능성만으로 진정한 변화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인식과 행위의 영역이 다른 것처럼 인식하는 주체가 어떤 방향으로 행동할 것인지 결정하는 문제가 남는다. 시인은 ‘정중동(靜中動)’을 택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겨울을 조금만 하려고 한다. 그것이 움직이는 만큼만.’ ‘머리는 꿈속에 있고 몸통은 굴러가기로 한다. 밤새 조금씩 움직이는 것만이 겨울이기 때문에.’(「아직 눈사람이 아닌」) ‘결국 발바닥이 온몸을 지탱하는 것이다. 발끝은 아니지만 발끝에서 시작되는 것이다.’(「표백」)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기 때문에/나는 너의 모든 것을 품고 싶은 것이다’(「괄호」)


‘전봇대 뒤의 세계’ 가녀리고 약한 존재, 어둠이 웅크린 곳에 시인의 시선이 멈춘다.
‘조용한 의자를 닮은 밤하늘’을 쳐다보며 시인의 목소리를 닮은 존재들이 겨우 발설하는 호흡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지만 자신이 그들을 위해 해줄 것이 마땅히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곧 불가능의 영역을 기억하고 되새기며 ‘기린과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사이에서’ 거닐 뿐이다.


‘기린은 기린인 것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이 도시의 골목들을 거닐 뿐/ 담장 바깥으로 넘어온 나무줄기를 느리게 씹으며 기린과/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사이를’ (「기린과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사이에서」)


3. 이 시인은 거대한 교각을 설치하기보다 흐르는 시내에 징검다리를 놓는 방식으로 독자가 건너편에 이르게 한다. 치밀하고 세세한 묘사 대신 길지 않은 호흡으로 이정표를 세우며 본질에 다가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깔끔하고 여백이 많은 작품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추천드린다.




- 얼음처럼, 12-13쪽

나는 정지한 세계를 사랑하려고 했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세계를.
나는 자꾸 물과 멀어졌으며
매우 견고한 침묵을 갖게 되었다.

나의 내부에서
나의 끝까지를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저 너머에서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들을.

그것은 꽉 쥔 주먹이라든가
텅 빈 손바닥 같은 것일까?
길고 뾰족한 고드름처럼 지상을 겨누거나
폭설처럼 모든 걸 덮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가위바위보는 아니다.
맹세도 아니다.

내부에 뜻밖의 계절을 만드는 나무 같은 것
오늘 아침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는 생각 같은 것
알 수 없이 변하는 물의 표면을 닮은.

조금씩 녹아가면서 누군가
아아,
겨울이구나.
희미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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