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시선 393
안희연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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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




1.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슬픔을 떠올려 보자. 과거의 경험일 수도 있고 가족의 죽음처럼 예정된 슬픔일지도 모른다. 작별인 줄 알았는데 영원한 이별이 현실일 때 슬픔은 풍선처럼 부푼다. ‘누군가와의 영원한 작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리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깊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고 하지 않는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란 외부의 환경변화로만 초래되는 것은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의 내면이 있다.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슬픔은 이끼처럼 달라붙어 있지만 시인을 포함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갯바위 같은 심장에는 이끼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유병장수 100세 시대’처럼
젊은 시인 안희연의 마음에는 슬픔이 끼여 있다.




2. 이 시집에는 ‘백색 공간’이라는 똑같은 제목의 시가 3편이나 실려 있다. 보통은 1.2.3. 이렇게 순서를 붙여주는데 별도 번호 부여 없이 동일한 제목으로 실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백색 공간’은 ‘무(無), 침묵, 순수, 백지상태’처럼 원초적인 상태나 감정을 떠올리게 한다. 내 앞에 흰 종이가 놓여 있고, 그곳에 마음으로 글이든 그림이든 쏟아내야 하는 것이다. 안희연 시인의 글과 그림 속에 짙게 베인 색깔은 무채색의 어둠이다. 암흑을 제거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안간힘을 쓰며 ‘새로운 옆’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서 동정과 공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최근 일어난 비극적 사건인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 백색 공간, 10-11쪽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쓰면/ 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중략// 그는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지독한 폭설이었다고/ 털썩 바닥에 쓰러져 온기를 청하다가도/ 다시 진흙투성이로 돌아와/ 유리창을 부수며 소리친다/ “왜 당신은 행복한 생각을 할 줄 모릅니까!”// 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 // 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밤/ 나는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 만든다



- 백색 공간 64-65쪽
이누이트라고 적혀 있다// 나는 종이의/ 심장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그것을 바라본다// 그곳엔 흰 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 설원을 달리는 내가 있다// 중략 // 나는 이곳이/ 완전한 침묵이라는 것을 알았다// 종이를 찢어도 두 발은 끝나지 않는다/ 흰 개의 시간 속에 묶여 있다




- 백색 공간 74-75쪽
그 방에선 나무가 자라고 있다/ 온몸이 뒤틀린 나무가 온몸을 비틀며 자라고 있다/ 몸속에 갇힌 태양/ 찬란했던 물의 기억을 태우며/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칠 때마다 시퍼런 이파리가 돋아났다/ 나는 황급히 문을 닫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자물쇠를 가지고 그곳으로 갔다// 방 안에는 웅크린 나무가 있다/ 중략 / 침묵이 고이면 얼마나 깊은 두 눈을 갖게 되는지// 나는 문을 걸어 잠그려다 말고/ 얼굴이 잘 보이는 높이에 작은 채광창을 그려주고 돌아왔다// 중략 / 눈을 뜨면 문턱을 넘고 있었다 새로운 모퉁이를 돌 때마다 가지 말라고 손짓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중략 // 온종일 입을 굳게 다문 날에는 물속에 잠긴 나무가/ 울면서 칼을 꺼내든 날에는 제 손으로 가지를 전부 부러뜨린 채/ 떨고 있는 나무가 보였다





3. 내가 가장 좋았던 시는 ‘개에게서 소년에게’였다.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을 의식한 제목 같은데, 최남선의 시가 희망찬 세계에 대한 계몽의지를 드러냈다면 안희연의 시는 ‘백지 바깥’의 불안과 어둠을 인정하고 ‘미숙한 무릎’이 미래 또한 자신이 겪어온 과거와 똑같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아직 오직 않은 과거) 끝의 손목을 끝내 놓지 않는 안간힘이 있다.

- 개에게서 소년에게 69-71쪽

목줄을 쥔 손목이 잠깐잠깐, 손목을 놓칠 때마다/ 개는 낯선 문을 통과한다 네 개의 발 속에 감춰져 있던/ 골목이 폭죽처럼 터져나온다 안이 우르르 밝아진다//*// 개는 자유자재로 손목을 꺼낼 줄 안다/ 샛길에 관해서라면 전문가에 버금가는 식견을 가졌다/ 소년은 이따금씩 목줄을 의심하지만/ 동행이거나 동행이 아니거나/ 붙들려 있다면 이미 흘러넘친 것//*// 잘 구겨지는 얼굴을 가졌다면/ 조각가의 섬세한 손길을 떠올리길/ 소년을 끌고 가는 것은 미숙한 무릎,/ 아직 오지 않은 과거이지만/ 골목을 헤매던 개가 불현듯 멈춘 곳에서/ 소년은 문득 시작되기도 하는 것이다//*// 목적없이 모였다가 흩어지기/ 제목이 없어서 가능한 마음들처럼/ 개는 단숨에 소년을 앞지를 수도/ 엎지를 수도 있지만/ 순서를 위해서는 아니다//*// 나란히라는 멀리/ 달력에는 없는 시간으로 굴러가는 바퀴들/ 담장을 넘어간 공이 무심코 돌아오듯/ 어느새 소년은 백지 바깥에 도착해 있다/ 어둠속에 홀로 남겨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창밖에는 황금빛 불안이/ 소년에게는 데려다주는 개가/ 개에게는 소년을 잃어버리기 위한 산책이 있다/ 누구도 이 산책의 끝을 모른다





4. 슬픔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면 이 시집을 읽어야 한다. 슬플 때는 슬픈 노래를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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