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感에 관한 사담들 문학동네 시인선 45
윤성택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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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감(感)에 관한 사담들, 문학동네




1. 현충일 연휴에 제주도에 다녀왔다. 모바일 체크인 카운터에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한 여자가 애완견을 비행기에 태우려고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 강아지는 승객도 화물도 아니기에 별도의 공간에 격리되어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것이다. 주인과 강아지는 비행하는 새의 어둑한 내장 속에서 숨죽이고, 고도가 높아갈수록 멍해지는 귀를 뚫으려고 침을 삼켰다. 꼬박 1시간은 그렇게 사실상 탈출구도 없이 허공에 묶여 조여오는 기압을 그리움으로 견뎌야 하는 존재가 우리다.





2. 윤성택 시인의 시집 ‘감(感)에 관한 사담들’에는 도시를 살아가는 일상의 사물(현금자동지급기, 모니터, 버스, 신문, 정류장 등)이 많이 등장한다. 사물의 특징과 본질을 예리한 감각으로 묘사하면서 개인의 내면에 고였다가 솟는 외로움을 그려낸다. 전체를 읽어보면 시인이 어떤 소재에서 착상을 하고 시상을 전개하는지 추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 현금 자동지급기 58쪽

늦은 밤 저리 환한 침묵으로 서 있다/ 나를 요약하는 한 뼘도 안 되는 조각/ 천천히 밀어넣는다/ 비밀번호를 누를 때마다 동태를 살피는/ 무인카메라가 거울 속 한 점으로 뚫려 있다/ 거래는 늘 일방적이다/ 관 속처럼 어두워지는 저편/ 일순간 검색되는 나날들,/ 기입된 과거를 훑고 나면/ 몇 자리 숫자로 명명될 것이다/ 일생을 기계 속으로 전송시킨다면/ 바코드로 된 영혼을 얻을지도 모르는 일/ 밀었다 당겼다 밤낮이 가고/ 끝내 계좌를 터오는 죽음으로부터/ 드드득드드득 타전되는 소리,/ 구겨지거나 반듯하거나 찢어지거나/ 이곳에서 다운로드 된 사람의 것이다




- 우선 시인은 현금 자동지급기를 구성는 외면적인 것과 속성을 뽑아보았을 것이다. ‘신용카드나 체크카드, 비밀번호, 무인카메라, 계좌이체, 입금영수증’ 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소재다. 주제를 ‘사회에서 개인이 느끼는 외로움이나 고독, 우울’ 쯤으로 잡아 놓고 제재를 활용해 시상을 전재한다. ‘나를 요약하는 한 뼘도 안되는 조각, 비밀번호, 무인카메라, 몇 자리 숫자, 바코드, 계좌를 터오는 죽음, 드드득드드득 타전되는 소리, 다운로드’라는 시어들을 잘 엮어 나가면 된다.
그러나 그 ‘잘’이 어렵다. 현학적인 시어들은 거의 없고, 한 번 읽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로 구성된 잘 짜인 그물에 한 번 몸을 맡겨보자.




한 편 더 소개하면서 마칩니다.

- 도시인, 14-15쪽 전문

이젠 나의 아이디는 서명을 숨기며 나를 믿지 않는다// 명함이 낙엽처럼 날리고, 노랗고 붉은 숫자가 우수수 차창에 꽂히면/ 신발은 차 트렁크 속으로 들어가 주말을 구겨 신는다// 오래 저장했던 너의 폴더에서 눈물 냄새가 난다/ 밤과 낮 기울지 않고 사라지지 않은 채/ 습기 찬 시간을 머금으며 이름 안에서 순장하듯//비스듬히 잠든 그녀 어깨가 밤빛에 젖는다/ 가방이 감싼 무릎을 접어 흰 손가락을 내려보낼 때// 기억은 눈물 밖에서 떨어지는 빗소리 같은 것이다// 검은 생풀 타오르는 굴뚝의 고백은/ 어떤 딱딱한 물리의 서러움, 연필 끝 지우개처럼/ 캄캄한 암연(暗然)을 향해서 핏기가 돈다// 아직 생성되지 않은 페이지들이 내가 가본 적 없는 곳에서/ 평생 외워온 패스워드를 찾고 있다 거기쯤/ 검색중인 저녁을 걷는 나의 골목// 가을이 온다, 핸드폰은 얇아지고 다시 아무 일 없듯/ 수많은 창들이 액정화면처럼 번들거리며/ 손가락의 힘으로 장면을 밀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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