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 주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2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그랑 주떼, 김혜나, 은행나무, 2014,
#그랑주떼 #김혜나

1. 엄마는 불교신자다. 그런데 나를 선교원에 보냈다. 6살, 7살을 선교원에 다녔다. 선교원에서 태권도를 배웠다. 태권도를 배우면 한 번은 고비가 온다. 다리를 찢어야 할 때다. 여자도 마찬가지겠지만 남자가 다리를 180도로 찢을 때의 고통은 안해 본 사람은 모른다. 유치원 때 이후로 고통이 나를 비껴갔다.


그랑 주떼(Grand Jute). 한 번 발음해 보기만 해도 엘레강스가 느껴지는 단어다. 발레 무용수가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두 다리를 일(一)자로 쭉 뻗는 동작이 ‘그랑 주떼’다. 가지런히 모여 있던 두 다리가 서서히 헤어지며 찢어진다. 찢어짐은 고통이지만 단단한 근육은 살이 찢어지며 새살이 돋아나는 순간 태어난다.





2. ‘예정’이라는 여자 아이가 있다. 키가 170센티미터가 넘고 발 크기가 270밀리미터인 이 아이의 발 위에는 크고 둥그런 ‘고’가 있다. 예닐곱 살에 무용을 시작했던 친구들과 달리 예정은 중학생이 되어서야 발레를 처음 시작했다. 스트레칭과 바(bar)운동까지는 곧잘 하면서도 센터(무대)에만 서면 예정은 배운 동작을 잊었다. 예정은 무용학원에서 원생을 가르치지만 무용을 할 수 없는 강사다.

- 크고 둥그런 고가 양 발등 위로 뭉툭하게 올라와 있다. 발끝을 뻗어 발등을 늘이자 고가 더욱 높이 솟아올랐다. 둥그렇게 넓은 거북의 등을 닮았다는 발등의 고. 그 위로 뭉툭뭉툭 솟아오르는 핏물마저 거북등의 표면처럼 거칠고 어두웠다. 7쪽


발등과 발목 사이의 뼈가 유난히도 많이 튀어나온 사람들이 있다. ‘고(甲;こう)’라는 것은 그러한 발등의 모양이 마치 거북의 등껍데기와 같아 보여 일본에서 먼저 쓰기 시작한 발레 용어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무용수들 사이에는 이 일본어 표현이 그대로 쓰였다. 23쪽




3. ‘예정’은 상처를 입고 변방에서 살았다.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했다. 조명 받는 가수의 뒤통수를 보며 노래를 불러야 했던 코러스 가수 같았다. 여덟 살 무렵 일어났던 무서운 기억이 그녀를 현재까지 짓눌렀다. 감당하기에 너무 벅차 그대로 주저앉아 울 수밖에 없었던 흉터를 지닌 채 살아왔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친구들과 얘기하는 도중에 각자가 꺼낸 상처를 기억해 두었다가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자 친구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면 상처 입은 사람들이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배우자에게, 부모님에게, 친구에게, 선생님에게도 말 못할 ‘무엇’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힐링, 위로, 격려’의 말은 그 자체로 선언적이고 권고적인 바람일 뿐이다. 상처가 아물어 딱지가 앉고 새 살이 돋아나는 시간은 온전히 나 자신이 견디고 이겨야 하는 시간이다. 조금씩 다리를 찢으며 ‘그랑 주떼’를 상상해보면 좋겠다.





- 소설의 마지막 부분

위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발등 고가 보였다. 고는 그 글자 그대로 정말 거북의 등처럼 보였다. 춤을 추지 못하는 나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던 것. 그런데도······ 태어날 때부터 내 발을 휘감고 있던 것. 나를 감추게 하던 것.
나는 발등을 길게 뻗어 늘였다. 그 순간 그 안에 담긴 것들이 모두 뻗어 나오는 듯했다. 나에게서······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동안 나를 떠나가 버린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나를 떠나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발등을 더욱 길게 늘였다. 바닥에 닿는 발끝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샤세, 샤세. 나는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며 샤세를 뛰었다. 안 아방, 안 오. 팔이 넓게 벌어지고, 멀리 나아가며, 나는 춤을 추었다. 높게 날아올랐다. 주떼 주떼, 그랑 주떼.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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