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창비시선 387
문태준 지음 / 창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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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1년 2월의 마지막 날 운전면허 시험을 치르고 서울로 떠났다. 이방인, 대학생, 하숙생으로 봄을 맞았다. 하숙집 주인 아저씨는 과일 장사를 하셨다. 매일 아침 저녁 밥상에는 사과와 귤이 있었다. 하숙집 바로 옆이 교회였다. 일요일마다 찬송가가 잠을 깨웠다. 친구들도 사귀고 학교생활도 익숙해져 갔지만 집에 가고 싶어 1학년 때는 기차를 타고 집에 갔었다. 서울역에서 창원으로 가는 새마을 호를 타면 대략 5시간 걸린다. 충북 영동을 지나 경북 김천 즈음이면 엄마가 쌀 씻는 소리가 들렸다. 김천은 가보지 못한 지나치는 장소지만 잊혀지지 않는 망각의 도시다.




2. 소설가 김연수, 김중혁, 텔런트 송윤아, 그리고 이 시집을 쓴 문태준이 김천출신이다. 조용한 시골의 정치를 느낄 수 있지만 교통의 요지이기도 한 묘한 정서가 이름에서 묻어난다. 그냥 내 느낌이다. 내가 자란 '창원'과 '김천'이 풍기는 향기는 확연히 다르다.


지난 번 김행숙 시인의 시집 '에코의 초상'에 관한 글을 쓰면서 김경주, 황병승, 김행숙 등으로 칭해지는 '미래파' '뉴웨이브'에 대해 언급했었다. 김행숙 시인이 문태준 시인은 1970년 생으로 동갑이다. 그러나 시적으로는 결이 다르다. 김행숙 시인이 존재의 내면에 눈길을 준다면 문태준 시인은 그가 사는 자연과 풍경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 조춘(早春) 25쪽, 전문



그대여, 하얀 눈뭉치를 창가 접시 위에 올려놓고 눈뭉치가 물이 되어 드러눕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뭉치는 몸을 부수었습니다 스스로 부수면서 반쯤 허물어진 얼굴을 들어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내게 웅얼웅얼 무어라 말을 했으나 풀어져버렸습니다 나를 가엾게 바라보던 눈초리도 이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한접시 물로 돌아간 그대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이제 내겐 의지할 곳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눈뭉치이며 물의 유골인 나와도 이제 헤어지려 합니다



--- 장춘(長春) 31쪽 전문

참 꽃을 얻어와 화병에 넣어두네// 투명한 화병에 봄빛이 들뜨네// 봄은 참꽃을 기르고 나는 봄을 늘리네



: 접시에 놓인 눈뭉치가 창가에서 일찍 찾아온 봄의 햇볕에 몸을 녹인다. 스스로 봄을 부순다. 녹을 수 밖에 없는 운명, 하얀 몸은 한접시 검은 물로 풀어지고 만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더욱 슬픈 것은 의지할 곳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른 봄, 길이를 늘인 봄'은 꽃에는 축복이고 눈에는 비극이다.




3. 얼마전 양양 낙산사에 다녀 왔다. 2005년 화마가 덮쳐 거의 모든 건물이 불에 탔다.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암과 함께 전국 3대 기도처라는 홍련암은 살아남았다. 해수관음상 앞에 일렬로 줄 선 사람들은 두꺼비 발가락을 세 번 만지고 소원을 빌었다. 해수관음상은 바다를 향해 서 있다. 처음에는 바다를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눈을 감은 듯 하다. 바다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듣고 있었다.




여시(如是) 39쪽 전문

백화(百花)가 지는 날 마애불을 보고 왔습니다 마애불은 밝은 곳과 어둔 곳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눈두덩과 눈, 콧부리와 볼, 입술과 인중, 목과 턱선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안면의 윤곽이 얇은 미소처럼 넓적하게 펴져 돌 위에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기도객들은 그 마애불에 곡식을 바치고 몇 번이고 거듭 절을 올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깊은 밤에 홀로 누워 있을 때 마애불이 떠올랐습니다 내 이마와 눈두덩과 양 볼과 입가에 떠올랐습니다 내 어느 반석에 마애불이 있는지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온데간데없이 다만 내 위로 무엇인가 희미하게 쓸려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 집에 돌아와서도 낙산사 해수 관음상이 잊혀지지 않았다. '여시(如是)'는 '이와 같다'는 뜻인데 '밝은 곳과 어두운 곳', '여행지에 거주지',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것과 모든 곳이 이와 같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4. 시인은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악취나는 시간을 건축하고 있다고 노래했다. 시간의 방에 방향제를 뿌려서 잠시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은 소용 없겠지. 시간의 더미들 속에 숨겨진 좋은 향이 나는 자갈 하나 찾기 위해 나는 자갈밭에 앉았다.



--- 더미들(드로잉3) 50쪽 전문

한 여름이 지나가는 휴일 오전이었다/ 딸이 거울과 책상과 옷장과 침대의 위치를 이러저리 바꾸고 있었다/ 엉킨 더미들은 정오에 자리를 잡았다 단련된 근육인 태양이 나의 딸의 정수리 위에 두건처럼 얹혔을 때에/ 나도 오후에 자갈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건축하려는 인부가 되어/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향기이며 악취인 시간을 건축하려고/ 느닷없는 소낙비의 곡조, 흐트러진 꽃밭더미, 옥수수의 어긋난 치열(齒列), 무너진 분수(噴水)더미, 비탄에 퍼질러 앉은 하오의 어머니들, 깨진 석양 항아리/ 이 시간의 더미들을 이고 지고 안고 밀고 끌어 옮기려고, 건축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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