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의 초상 문학과지성 시인선 455
김행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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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0년에 20살이 되었다. 컴퓨터가 이상해질거라는 걱정, 인류가 멸망할 거라는 종말론은 새천년의 도래와 동시에 철새처럼 날아갔다. 나는 대학캠퍼스 대신 재수학원에 갔다. 남들보다 1년 늦게 들어간 대학생활도 그리 낭만적이거나 서정적이지 않았다. 1998년 외환위기를 겪고 복학한 선배들은 불안해 했고, 저학년들도 미리미리 토익점수라도 따 둬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내가 학원이나 덜그럭 거리는 책상에 앉아 문제집 풀고 있을 떄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부터 새로운 시(詩)가 등장했다. '미래파' '뉴웨이브' 등으로 불리면서 이전과는 다른 경향을 띄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시라고 생각하는 전통적인 서정에서 벗어나 도무지 읽어도 알 수 없는 말들과 기괴한 단어들이 등장한다. 김경주, 황병승, 김행숙 시인 등의 시들은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몇 번을 읽으면 겨우 알 것 같은 시도 있다.



2. 일단 이 시집의 첫 시를 보자.


- 인간의 시간, 11쪽, 전문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물결처럼// 우리는 깊고/부서지기 쉬운// 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처럼

: 인간은 불안한 존재다.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어디로 툭 내던져진(피투성) 존재다. 시간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시계를 발명했다. 흘러가는 시간을 쪼개어 그에 맞추어 생활한다. 연인과 약속을 하고 정해진 장소에 정해진 시간에 데이트를 하고 사랑을 나눈다. 시간은 딱딱하지 않다. '물결처럼' 부드럽고 그래서 쪼개지기 쉽고 부서진다. 우리는 언제나 어느 시간 한 가운데에 있다.



3. 이 시집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존재' '시간' '에코' '죽음' '침묵' '말(언어)'을 꼽겠다. 단어들만 봐도 하이데거가 떠오른다.



- 존재의 집, 12쪽, 전문


 그런 입 모양은 아직은 침묵하지 않은 침묵을/침묵으로 들어가는 입구를/입구에서 조금만 더,/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기다리고, 끊어질 것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을 뜻한다/ 그 사람이 얼음의 집에 들어와서 바닥을 쓸면 빗자루에 묻는 물기 같고/ 원래 그것은 물의 집이었으나 살얼음이 이끼처럼 끼기 시작하고/ 물결이 사라지듯이 말수가 줄어든 사람이/ 아직은 침묵하지 않은 침묵을/침묵으로 들어가는 좁은 입구를/ 그런 입 모양은/ 표시했다/ 식사 시간에 그런 입 모양이 나타났을 때 숟가락을 떨어뜨렸고, 그 사람은 숟가락을 떨어뜨린 줄도 몰랐는데/ 그 숟가락은 무엇이든 조금씩 조금씩 덜어내기에 좋은 모양으로 패어 있고/ 구부러져 있다/ 숟가락의 크기를 키우면 삽이 되고, 삽은 흙을 파기에 좋다/ 물, 불, 공기, 흙 중에서 흙에 가까워지는 시간에/이를테면 가을이 흙빛이고 노을이 흙빛이고 얼굴이 흙빛일 때/ 그런 입 모양은 아직은 입을 떠나지 않은 입을/ 아직은 입으로 말하지 않은 말을/ 침묵의 귀퉁이를/ 아직까지도 울지 않은 어느 집 아기의 울음을



: 인간을 입을 열어 말을 한다. 입을 닫고 침묵한다. 입을 반쯤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는 것은 할말이 있어 말을 하려는 순간이거나 할 말이 있지만 말을 삼키는 순간, 즉 '침묵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막 들어선 순간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갓 태어나 막 울음을 터뜨리려는 순간이거나 '얼굴에 흙빛'을 띄는 죽음의 순간에 마지막 유언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쓸 때다. 그런 입은 존재의 집이다.



4. 이 시집의 마지막 시이자, 이 시집의 표제작이다.



- 에코의 초상, 136쪽, 전문


입술들의 물결, 어떤 입술은 높고 어떤 입술은 낮아서 안개 속의 도시 같고, 어떤 가슴은 크고 어떤 가슴은 작아서 멍하니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 같고, 끝 모를 장례 행렬, 어떤 눈동자는 진흙처럼 어둡고 어떤 눈동자는 촛불처럼 붉어서 노을에 젖은 회색 구름의 띠 같고, 어떤 손짓은 멀리 떠나보내느라 흔들리고 어떤 손짓은 어서 돌아오라고 흔들려서 검은 새 떼들이 저물녘 허공에 펼치는 어지러운 군무 같고, 어떤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꿈에서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영원히 보게 될 것 같아서 너의 마지막 얼굴 같고,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아, 하고 일을 벌리는 것 같아서 살아있는 얼굴 같고,


: 여기서 입은 조금 더 구체화 되고 있다. '끝모를 장례 행렬'과 누군가를 멀리 떠나보내느라 흔드는 손짓, '마지막 얼굴'이 나타나고 '아, 하고 입을 벌리'며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에코'는 수다스러워 헤라에 의해 벌을 받아 남의 말이 끝난 뒤에는 지껄일 수 있지만 남에게 먼저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에코'는 후에 나르키소스를 사랑하지만 나르키소스가 아무리 불러도 그의 끝말만 반복할 뿐이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타자성의 실패의 전형이 에코다. 타자성을 잃은 입(말)은 죽음과 같다.


쭉 읽어나가다가 눈에 가는 시를 반복해서 읽고 의미를 추론해보고

나의 생각을 접목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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