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에 관하여
사람을 만나서 사랑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일까, 사랑의 감정이 일어나는 순간
상대를 만나게 된 것일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오래된 물음과 유사한 듯 하지만 내 생각은 전자나 후자나 본질은 같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이렇게 시작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고 나타샤를 떠올리는게 논리적 순서에 맞겠다. 백석은 그러나 내가 나타샤를 사랑했기 때문에 오늘밤도 이렇게 눈이 푹푹 나리고
당나귀도 응앙응앙 울 것이라고 시침을 뗀다.
"사랑이 하고 싶어서 나 만난거 아냐?"
"아냐 너 아니었음 독신으로 살려구 했어."
앞으로는 사랑이 일어나서 너를 만났다고 당당하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일어남' 과 '사람을 만남'은 인과관계가 아니라
병렬적인 사건의 발생이다.
짧은 글을 지어 보았다.
#순서
-순서-
사람을 만났다
사랑을 만났다
닭을 보았다
달걀을 보았다
비가 내렸다
슬펐다
눈이 내렸다
기뻤다
떠났다
가난했다
울었다
웃었다
양산을 썼다
우산을 썼다
남자와 여자
배와 항구
하늘과
땅
밀고
당김
나란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