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세계 - 개정3판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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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침묵의 금이다'라는 말이 있다. 침묵의 위대한 가치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 오늘날 실증적이고 경험주의적인 사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한참 철 지난 클리셰로 치부되곤 한다.

 

 

아내, 여친 : "오빠, 나 사랑해?"

남편, 남친 : "(당황하며) 음...그걸 말로 해야 알어?"

 

남자는 대번에 구박당한다. '침묵이 금이다'를 이런 상황에서 말해봤자 역효과다.

 

조금 다른 상황을 보자.

 

아내(여친) : 오빠, 나 사랑해?

남편(남친) : 응, 사랑하지~

아내(여친) : 정말, 얼만큼?

남편(남친) : 많이. 하늘만큼 땅만큼

아내(여친) : 뭐야, 유체이탈이야? 영혼이 없어?

 

그렇다. 남자는 또 구박당한다. 남자는 모른다. 침묵은 금이 아니라며, 표현해도 뭐라 그러고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미치겠다.

 

 

2. 남자의 문제점을 살펴보자(나도 문제 많은 인간이다. 분석해서 원인을 아는 것과 실천이 별개임은 명심하자.

 

 

남자의 영혼없는 '잡음어'(이 책에 나오는 표현)는 침묵이 결여된 웅얼거림이자 무조건 반사일 뿐 말(언어)이 아니다. '말 하기전 3초만 생각하라'는 말이 있듯, 진정성은 침묵에서 묻어 나온다.

침묵은 언어에 힘을 부여하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있다.

 

"사랑에 한계를 짓고 분명하게 해주며, 사랑에게 사랑에 적합한 것만을 주는 것은 말이다. 사랑은 말을 통해서 구체화되며, 말을 통해서 진리 위에 서게 되며, 말을 통해서, 오직 말을 통해서만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된다. 사랑은 단순한 하나의 샘물과 같다. 그 샘물이 둘레에서 꽃들이 자라나는 자갈 바닥을 뒤로 하고 이제 하나하나의 물결과 함께 냇물로서 혹은 강물로서 자신의 성질과 모습을 변화시켜가다가 마침내 가없는 대양 속으로 흘러든다. 그 대양은 미성숙한 정신을 가진 자에게는 참으로 단조로워 보이지만, 위대한 영혼은 그 해안에서 끝없는 명상에 잠긴다.(발자크) 111쪽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알아주겠지, 하는 마음은 접어두고, 잠시 침묵하자. 묻는 말에 왜 뜸들였냐는 구박을 받더라도 잠깐의 침묵은 사랑에 토핑을 얹어줄 것이다.

 

 

2. 이 책은 침묵과 말, 말이 진리에 이르는 과정, 침묵과 말 사이에 놓인 신(GOD)적 의미, 언어의 존재성, 침묵과 상반되는 소음과 소란, 잡음어에 관해 말하고 있다. 역자는 최승자 시인으로 원문을 읽을 능력이 없으나, 한글로 번역된 책은 잠언집이나 하나의 시(POET)이다. 처음 이 책을 펼치게 한 30여쪽을 읽어 나가면서 충격을 받았다. '침묵은 금이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1948년에 출판된 책으로 챕터 중에 '라디오'를 침묵과 반대되는 부정적 기계로 묘사하는데, '라디오'를 휴대폰,텔레비전,컴퓨터로 대치해보면 여전히 큰 울림을 준다.

 

3. 수많은 전란을 겪고, 일제시대와 독재시대를 숨죽이며 침묵해야 했던 사람들을 연약한 민초, 교화대상으로 치부하고 폭압을 하면서 식민지근대화론이나 독재정권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침묵의 의미를 모른다. 사람들이 침묵해야 했던 것은 순응이 아니다. 침묵으로 저항했고, 표현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된다. 고로 존재하지 않는다"가 되었다. (257쪽)

 

조금 변형시켜 보자.

"나는 침묵한다. 고로 존재한다."

 

소음과 잡음어를 연료로 돌아가는 기계세상에서 침묵하자.

 

### 메모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자리에는 언제나 제삼자가 있다. 즉 침묵이 귀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27쪽

 

역사는 두 가지 측면으로 살아간다. 그것은 낮의 측면, 가시적인 것과 인식 가능한 것의 측면과 암흑의 측면, 불가시적인 것과 침묵의 측면이다. 역사에서 기억되거나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사건들은 헤겔이 말한 것처럼 어떤 "근거 없는 존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침묵을 위한 사건들이다. 94쪽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그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128쪽)

 

아기의 언어는 소리로 변한 침묵이다. 어른의 언어는 침묵을 추구하는 소리다.(136쪽)

 

여전히 침묵이 작용하는 시대에는 전쟁이 침묵의 배경을 통해서 알려지게 된다. 전쟁은 침묵의 배경에 부딪쳐 분명하게 반향되었다. 234쪽

 

그러나 지금은 병 덕분에 한마디 말이 음성으로 변할 때, 그것은 하나의 사건과 같은 것이며, 침묵으로부터 다시 한마디 말을 끌어내는 데 성공하면 그것은 하나의 창조와 같다.(뇌졸증을 앓는 교수에 관한 설명 중,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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