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모비 딕 1~2 - 전2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허먼 멜빌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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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맬빌, 황유원 옮김, 모비 딕 1, 문학동네, 2019

 

줄거리는 단순하다. 흰 향유고래인 모비 딕의 공격에 한쪽 다리를 잃은 피쿼드 호의 선장인 에이해브, 1등 항해사 스타벅, 2등 항해사 스터브, 3등 항해사 플래스크, 작살잡이 퀴퀘그와 선원으로 승선한 화자 이슈미얼이 승선한 범선이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모비 딕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이슈미얼만 살아 남고 모두 죽게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줄거리가 짧다고 해서 그 내용이 가볍다는 건 절대 아니다. 백과사전에 가까운 고래에 대한 상세한 설명, 성경에 레퍼런스를 둔 수많은 상징, 언어유희, 고래잡이 배에 관한 상세한 묘사, 인류의 모든 군상들이 모두 한 배에 탄 듯한 인물 설정 등.

 

 

 

'모비 딕'이라는 존재에 대해 악이나 정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평면적 해석을 넘어서서, 신이라는 존재에 버금할 만한 초월적 상징, 인간의 욕망, 에이해브가 고래를 쫓는 것이 아니라 고래가 에이해브를 쫓는 것이라는 약간 운명론적인 해석까지 다양하다. 종교와 인간이 이룩한 물질문명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과 더불어 생태학적으로, 페미니즘적으로도 토론할 거리가 충분하다. 그래서 읽어도 읽어도 다시 읽게되는 마치 마르지 않는 바닷물처럼 이 책의 넓이와 깊이는 가늠할 수 없이 압도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201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에서 작가가 여행을 다니면서 손에 놓지 않았던 책이라고 해서 찾아서 읽게 되었는데, 왜 그녀가 끊없이 대륙과 해양을 여행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고 파편을 모은 듯한 "방랑자들"의 형식이 모비 딕에서 차용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레고리 펙이 주연한 1950년 대의 동명의 영화와, 영화 "하트 오브 더 씨(2015)" 크리스토프 샤부테의 그래픽노블을 함께 보면 좋겠다. 난 우선 멜빌의 단편집과 위 그래픽노블을 읽고, 다시 모비딕 1,2권을 읽을 생각이다.

 

 

-이슈미얼: 창세기 16, 아브라함과 이집트인 시녀 하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이삭을 잉태하자, 하갈과 함께 광막한 사막으로 내쳐져 그 이름은 관용적으로 추방자’ ‘사회에서 버려진 자를 뜻한다. 전통적으로 이스마엘은 아랍인의 조상으로, 이삭은 유대인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37

 


- 에이해브(Ahab)는 불길한 이름이다. 열왕기상1628절에서 2240절에는 우상을 숭배하여 폭정을 일삼았던 아합왕과 그의 방종한 왕비 이세벨 이야기가 나온다. 168쪽 각주

 

 

- 펠레그가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넣은 채 선실을 당당히 가로지르며 외쳤다. “다들 저 인간이 하는 말 좀 들어보라고. 한번 생각해봐! 당장이라도 배가 가라앉을지 모르는 판에! ‘죽음심판이라고? ? 돛대 세 개가 전부 뱃전을 처박아 계속해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대고, 앞뒤 좌우 할 것 없이 사방에서 파도가 우리를 덮쳐오는데, 그 와중에 죽음심판을 생각한다고? 헛소리! 그럴 때 죽음에 대해 생각할 여유 따윈 없어. 에이해브 선장과 내가 생각했던 건 바로 목숨이야. 어떻게 하면 선원을 모두 살릴 수 있을지-어떻게 하면 임시 돛대를 세울 수 있을지-어떻게 하면 가장 가까운 항구로 갈 수 있을지, 그런게 내가 생각했던 거야.” 186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포경 보트에 태우지 않겠다고 스타벅은 말했다. 이 말은 가장 믿을 만하고 쓸모 있는 용기란 위험에 맞딱뜨렸을 때 그 위험을 똑바로 헤아리는 데서 생겨난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겁쟁이보다 훨씬 더 위험한 동료라는 뜻이기도 했다. 226

 

말도 못 하는 멍청한 짐승에게 복수라뇨!” 스타벅이 소리쳤다. “녀석은 맹목적인 본능에 따라 선장님을 공격했을 뿐입니다! 미친 짓이에(310)! 멍청한 짐승 때문에 격분하는 건 말이죠, 에이해브 선장님, 제게는 신성모독으로 보입니다.” 311

 

“... 이보게, 눈에 보이는 대상은 모두 두꺼운 종이로 만든 가면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삶이라는 의심할 수 없는 행위 속에서-벌어지는 모든 일들의 경우,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이성적인 무언가가 비이성이라는 가면 뒤에서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거푸집을 내미는 법이지. 만일 뭔가를 찌를 생각이라면 바로 그 가면을 꿰뚫어야 해! 죄수가 벽을 뚫지 않고 무슨 수로 밖으로 나갈 수 있겠나? 나에게는 그 흰 고래가 바로 그 벽이야. 아주 바싹 다가선 벽이지. 가끔은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으리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네. 하지만 아무러면 어때. 녀석은 나를 무지막지할 정도로 괴롭히고 있단 말이야. 나는 녀석에게서 난폭한 힘과 그 힘을 북돋워주는 헤아릴 수 없는 적의를 느껴.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존재야말로 내가 가장 증오하는 것이지. 그 흰 고래가 대리인이건 본체건 간에, 나는 그 증오를 녀석에게 쏟아부을 거야. ... ”311

 

선실. 선미 쪽 창가. 에이해브가 홀로 앉아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나는 희고 흐릿한 항적을 남긴다. 내가 어디를 항해하건 바다는 창백하고, 두 뺨은 그보다 더 창백하다. 시샘하는 파도가 내가 낸 길을 삼켜버리려고 옆에서 비스듬히 부풀어오른다. 뭐 그러라지. 어차피 내가 한발 더 앞서나간다.

저기 저 언제나 넘칠 듯 가득차 있는 술잔 가장가지로 따스한 파도가 포도주처럼 얼굴을 붉힌다. 황금빛 이마는 푸른 바다의 수심을 잰다. 태양은 잠수부가 되어-정오 때부터 천천히 잠수하기 시작했다- 아래로 내려간다. 내 영혼은 위로 올라간다! 끝없이 계속되는 언덕이 나를 지치게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혹시 내가 쓴 왕관이 너무 무거운(317) 일까?

 

은하수의 새하얀 심연을 바라볼 때, 우주의 비정한 공허함과 광대무변함을 희미하게 보여주면서 소멸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의 등을 찌르는 것은 그 색의 무한함이 벌이는 짓일까? 혹시 흰색은 본질적으로 색이라기보다는 가시적인 색의 부재인 동시에 모든 색의 결합체인 것은 아닐까 광활한 설경이 소리 한 점 없이 텅 비어 있으면서도 의미로 가득차 있는 것, 색이 아니면서도 모든 색이 응집된 무신론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꺼리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367

 

그래, 우연, 자유의지, 숙명-이것들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이 모두가 하나로 엮인 채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궁극적인 항로에서 벗어날 일 없는 숙명의 곧은 날실, 그것이 다른 실과 교차할 때 일어나는 모든 진동은 사실 그 작용을 돕고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는 여전히 주어진 실 사이로 자신의 북을 자유로이 움직여대고 있다. 그리고 우연은 그 행동반경이 숙명의 직선 내로 제한되고 옆으로의 움직임은 자유의지의 명령에 따르지만, 이처럼 둘의 지시를 받을지라도 우연 또한 차례로 숙명과 자유의지를 지배하며 결과에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는(399) 역할을 한다.




허먼 맬빌, 황유원 옮김, 모비 딕 2, 문학동네, 2019

 

하지만 그 철커덕거리는 쇠사슬에 매인 것은 배가 아니라 고래의 거대한 사체였다. 머리는 선미에, 꼬리는 선수에 묶인 고래는 이제 그 시커먼 몸뚱이를 선체에 바싹 붙인 채 누워 있었는데, 높이 솟은 활대와 삭구를 시야에서 가려버린 밤의 어둠 속에서 보면 이 둘, 배와 고래는 같은 멍에를 쓴 거대한 수소들이, 한 마리는 누워 있고 또다른 한 마리는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25

 

향유고래의 거대하고 얌전한 머리 위에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명상이 낳은 수증기가 덮개처럼 드리워(164)져 있고, 그 수증기는 마치 천국이 향유고래의 생각을 보증하는 도장이라도 찍은 양 무지개의 찬양을 받고 있다. (···) 그와 같이 이따금 신성한 직관이 내 마음속에 드리워진 어두운 의심의 짙은 안개를 뚫고 솟아나와 그 안개를 한줄기 천상의 빛으로 불태워버릴 때가 있다. (···) 세속의 모든 것에 대한 의심과 천상의 어떤 것에 대한 직관, 이 둘을 겸비한 사람은 신자도 불신자도 아니게 되며, 그러한 사람은 양쪽 모두를 공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165

 

네덜란드의 포경법 1695

. ‘잡힌 고래는 그것을 잡은 자의 소유다.

. ‘놓친 고래는 먼저 잡는 자가 임자다. 201

 

그런데 죽을 준비를 완전히 다 끝마치고 관이 자신에게 딱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퀴퀘그는 갑자기 원기를 되찾았다. 이윽고 목수가 만(348)든 관은 쓸모가 없어진 듯 했다. 그리하여 몇몇 선원들이 기쁨에 찬 놀라움을 표하자, 그는 자신이 갑자기 나은 이유를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위태로운 순간에 이르자 문득 아직 다 끝내지 못한 육지에서의 자잘한 의무들이 떠올랐고, 그래서 죽음에 대해 생각이 바뀌었다고. 그는 분명히 말하길,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선원들은 죽고 사는 것이 퀴퀘그 자신의 독자적 의자와 희망에 달린 문제냐고 물었다. 그는 분명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마디로, 만일 사람이 살기로 결심하면 그저 아픈 것만으로는 죽을 수 없다는 게 퀴퀘그의 생각이었다. 349

 

송두리째 지나가버린 내 삶의 거센 파도여, 아득히 먼 대양의 끝에서 지금 이곳으로 밀려와 집채만한 파도와도 같은 나의 이 죽음을 더욱 높이 일게 해다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는 못하는 고래여, 너를 향해 나는 힘차게 나아간다. 최후의 순간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고, 지옥의 한복판에서 너를 찌를 것이다. 오로지 증오만이 가득한 내 마지막 숨결을 너에게 내뿜어주마.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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