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의 현대시 산고 - 황현산 유고 평론집
황현산 지음 / 난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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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황현산의 현대시 산고, 난다, 2020

 

 

- 2012년부터 2017년까지 계간『문예중앙』에 연재했던 길지 않은 글 모음집이다.

이육사, 백석, 전봉건, 김수영, 김종삼, 최하림, 박서원 같은 우리나라 시인과 아폴리네르, 발레리처럼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의 작품의 일부와 평이 실려 있다. 본격적인 비평과 시에 관한 평문의 중간 쯤에 이 글은 발을 걸치고 있어서, 너무 난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글이라 반갑다. 마치 시에 관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시리즈 같다고 할까. 특히 부록 형식으로 담긴 「젊은 비평가를 위한 잡다한 조언」은 비평가 뿐 아니라 글을 쓰거나 읽는 사람들이라면 읽어둘 만한 충고와 바람이 담겨 있어서 좋았다. 이 책을 징검돌 삼아 대산문학상 수상 평론집 『잘 표현된 불행』을 읽어볼 참이다.

 

 

- 김종삼, 「어디메 있을 너」부분

 

학교와 그 사이/ 새들의 나래와 깊은/ 숲속으로 스며 든/ 푸름의/ 호수와// 학교와 그 사이에/ 石家 하나/ 鐘閣 하나/ 거기에 너는 있음직 하다 150-151쪽

 

- 김종삼, 「베루가마스크」

그 부근엔,/ 당나귀 귀같기도 한 잎사귀가/ 따 위에 많이들 대이어 있기도 하였다./ 처마 밑에 달린 줄거리가 데룽거렸던/ 어느 날엔/ 개울 밑창 파아란 해감을 드려다본 것이다. 내가 먹이어 주었던 강아지 밥그릇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몇 해가 지난 어느 날에도 / 이 앞을 지나게 되었다. 157-158쪽

 

- 최하림, 「광목도로」219-220쪽

 

어둠과 함께 온 기억들에 싸여 나는/ 나를 밝혀주지 못하는 불빛을 본다/ 빛이 멀면 편안하다 죄가 많은/ 우리는 죄들이 두렵고 어둠이 내려서/ 아름다우니 어둠에 몸 섞는다/ 이런 밤 새들은 얼마나 조심스레/ 그들의 하늘을 날았던지/ 내 영혼은 어디를 방황했던지/ 검은 유리 같은 공기 속에서 길들은/ 보이지 않게 밤으로 이동하고/ 새로이 추억이 짐짝처럼 마른 나무 밑에 쌓인다/ 시간이 별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흘러간다/ 시간을 따라서 광목도로 어디쯤 걸음을 멈추고 쉴 곳이 있을 것이다/ 잠시 유숙할 집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범한 죄를 우리가 사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한 사람에게만은 사랑이었고 배반이었던 여자도 어디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결국 너를 버리고 달려간다/ 그래서 세상은 고통스럽고 일어서는 자는 숨을 수 없어서 불행하다/ 내 가슴은 사직처럼 무너져 내린다/ 예감을 노래해서는 안 된다/ 나는 밤으로 간다 잘 있거라/ 한 번도 힘껏 꽃잎 피지 못하고/ 한 번도 힘껏 돌아보지 못한/ 가여운 말들아 내 딸들아

 

- 박서원, 「연장통」257-258쪽

 

무엇부터 버려야 할까// 낡은 의자 다리를 고치는 망치?/ 한 번은 고슴도치도 때려잡은 일도 있는,// 또 오렌치빛 외투 속에 감추고 다닌 적이/ 있던 잭나이프?// 못은 그동안 모서리마다 진저리치게/ 했지// 아침이면 배달되는 신문은/ 송곳으로 이곳저곳 구멍이 났어// 연장통은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수시로 집 안을 들쑤셔놓곤 했던 거야/ 참 긴요한 물건들이었는데.// 하지만 이젠 버려져야겠지// 새집엔 새 연장들이 필요하니까/ 방금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우기던/ 것들이지만,// 난 명령한다. 차렷!//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새 아침을 여는 것은/ 아닌 것을// 무엇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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