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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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황정은 소설집, 연년세세, 창비, 2020

 

  이순일(이순자)와 그의 남편 한중언, 그들의 딸 한영진과 한세진, 아들 한만수로 이루어진 한 가계에 대한 이야기의 외양을 가진 연작소설이다.

 

작가의 말) ...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가족 이야기로 읽을까? 그게 궁금한 적이 있었고 실은 지금도 궁금하다.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로 읽히건,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이야기이기를 바란다. 185쪽

 

작가의 말과 곳곳에 배치된 ‘순자’라는 상징에 비추어 보면 이 연작소설은 단순한 가족에 관한 서사가 아니다. 이순일을 중심에 두면 6.25.전쟁의 비극을 겪인 전쟁세대의 여성에 관한 스토리로, 백화점의 이불매장 판매직원으로 일하면서 친정과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장녀의 이야기, 이상과 현실의 격차에 좌절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중년과 청년세대의 이야기(한세진과 한만수), 한중언과 김원상과 한만수로 대표되는 남성성의 몰락과 무능력에 관한 페미니즘적 서사 그리고 가족이라는 경계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면서도 끝끝내 마음을 열지 못하는 현대인의 이야기 등등.

 

매 소설마다 시점을 바꾸어 각 인물들의 내면과 이야기를 중층적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연작소설의 장점이다. 더불어 6.25. 전후부터 2016년 촛불집회 그리고 현재까지 현대사의 비극과 슬픔이 본격적이 아닌, 긁힌 상처 같은 형태로 곳곳에 새겨져 있어 더 좋았다.

 

 

파묘(破墓)


 

「하고 싶은 말」

 

- 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70쪽

 

- 한영진은 갓난아기와의 간격이 조금 벌어진 뒤에야 아이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아이를 유심히 보고 싶은 마음, 다음 표정과 다음 행동을 신기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마음, 찡그린 얼굴을 가엾고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 관대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 인내심······ 모든 게 그 간격 이후에야 왔다. 한영진의 모성은, 그걸 부르는 더 적절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언젠가 한영진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타고난 것이 아니고 그 간격과 관계에서 학습되고 형성되었다. 그건 만들어졌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한영진은 둘째를 낳을 수 있었고 첫 번째보다는 여유 있게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이들을 지금은 좋아했다. 이순일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한영진은 알고 있었다. 이순일의 노동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75쪽

 


 

「무명(無名)」


 

- 니가 순자를 모른다고? 이순일은 어리둥절해 한세진을 바라보았다. 이 애가 순자를 모르는구나.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 갈골에서 부모와 사별한 순자, 지경리에서 할아버지와 살던 순자, 그리고 그 순자가 열다섯살 때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에서 만난 순자. 내 동무, 이웃, 동갑이자 동명(同名)인 순자. 내가 순자의 뺨을 때렸고 순자는 울지도 않았다. 이 이야기를 다 어떻게 할까, 어디부터. 90쪽

 

- 배추밭을 혼자 기었다면 어른들을 놓치지 않았을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혼자였다면 그 밭을 무사히 기어(102쪽) 어른들을 따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이 있었어. 그 아이가 조그만 양파 꾸러미처럼 내 등에 묶인 채 업혀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발로 바닥을 밀고 엉덩이를 들 때마다 등에 업힌 동생의 머리가 달랑거리며 목 뒤를 짓눌렀다. 다섯 살 등에 업힌 세 살의 무게. 나는 그 밤 그 밭골에서 천근만근의 무게를 알았다. 백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 아이는 내 등에 업혀 있었어. 마당으로 들어서서 달을 등진 채 한동안 서 있을 때에도, 다급히 짐을 꾸려 떠난 흔적으로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방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누워 있을 때에도 그 아이는 있었다. 그뒤로 몇밤 더 지나고 마을 어른들에게 발견된 때에도 그 아이는 있었고 지경리 집 삽짝을 밀고 들어가 할아버지를 봤을 때에도, 흠투성이 개다리소반에 올린 삶은 감자와 동치미로 그 집에서 첫 밥을 먹을 때에도 그 아이는 있었다. 103쪽

 


「다가오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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