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 - 허수경이 사랑한 시
허수경 지음 / 난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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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허수경,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허수경이 사랑한 시), 난다, 2020

 

2009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시와 짧은 감상에 관한 원고를 정리한 책이다. 보았던 시와 처음 보는 외국 시인의 시가 함께 실려 있다. 시보다는 시에 관한 저자의 글에 눈길이 더 갔다. 왜 이 시를 골랐으며, 그때 느꼈던 감정을 조곤조곤 설명하고 있다. 마치 어깨를 맞대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신문의 지면적인 제약 때문에 주로 짧은 시가 실려 있는데, 손이든 키보드이든 천천히 필사해보면서 읽어나가면 더욱 좋을 것 같다.

 

 

 

- 「로렐라이」, 하인리히 하이네

 

멜로디는 작은 배를 탄 뱃사람을/ 거친 슬픔으로 휘어잡았네/ 그는 암초를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위를 올려다보았네.// 내가 알기로는 마침내 물결이/ 뱃사람과 배를 삼켜버렸다네/ 로렐라이가 부른 노래가/ 그렇게 했다고 하네. 65쪽

 

- 「물과 빛이 끝나는 곳에서」, 이성복 80쪽 , 2시집『남해 금산』에 수록, 김현의 해설 〈치욕이 시적 변용〉

 

물과 빛이 끝나는 곳에서 종일 바람이 불어 거기 아픈 사람들이 모래집을 짓고 해 지면 놀던 아이들을 불러 추운 밥을 먹이다/ 잠결에 그들이 벌린 손은 그리움을 따라가다 벌레먹은 나뭇잎이 되고 아직도 썩어가는 한쪽 다리가 평상 위에 걸쳐 누워 햇빛을 그리워하다/ 물과 빛이 끝나는 곳에서 아직도 나는 그들을 그리워하다 발갛게 타오르는 곤충들의 겹눈에 붙들리고, 불을 켜지 않은 한 세월이 녹슨 자전거를 타고 철망 속으로 들어가다/ 물과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의 얼굴은 벌레먹은 그리움이다 그들의 입속에 남은 물이 유일하게 빛나다

 

 

- 「부빈다는 것: 도장골 시편」, 김신용, 96-97쪽

 

안개가/ 나뭇잎에 몸을 부빈다/ 몸을 부빌 때마다 나뭇잎에는 물방울들이 맺힌다/ 맺힌 물방울들은 후두둑 후둑 제 무게에 겨운 비 듣는 소리를 낸다/ 안개는, 자신이 지운 모든 것들에게 그렇게 스며들어/ 물방울을 맺히게 하고, 맺힌 물방울들은/ 이슬처럼, 나뭇잎들의 얼굴을 맑게 씻어준다/ 안개와/ 나뭇잎이 연주하는, 그 물방울들의 화음,/ 강아지가/ 제 어미의 털 속에 얼굴을 부비듯/ 무게가/ 무게에게 몸 포개는, 그 불가항력의/ 표면장력,/ 나뭇잎에 물방울이 맺힐 때마다, 제 몸 풀어 자신을 지우는/ 안개,/ 그 안개의 입자들// 부빈다는 것// 이렇게 무게가 무게에게 짐 지우지 않는 것// 나무의 그늘이 나무에게 등 기대지 않듯이// 그 그늘이 그림자들을 쉬게 하듯이

 

- 「사랑」, 김근, 102쪽

 

그러나 돌의 피를 받아 마시는 것은/ 언제나 푸른 이끼들뿐이다 그 단단한 피로 인해/ 그것들은 결국 돌빛으로 말라 죽는다 비로소/ 돌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 「서적」, 조연호, 107쪽

 

내 책읽기가 아름다워진 건 독서가 가장 낙후된 장르였던 시대의 일이었다. 황량한 이 별의 느낌이 좋아서 나는 옥상에서만 문장을 만들고, 필라멘트를 쥔 작은 전구는 가족들의 불면을 향해 좀더 걸었다. 두 발을 한쪽 구두에 집어넣는 기분으로 계단이 시작된다. 악연은 모두에게 신발과 같은 것이고 이제 난 그것 한 켤레로 걸음이 점점 편해질 것이다. 팔다리 자라는 소리가 하나 가득 귀를 울리는, 그보다 더 지루한 성장은 없었다. 문지른 책받침에 머리카락이 떠오르는 걸 여자애는 무료하게 한 올 한 올 들여다본다. 책을 읽는 당신은 푸른 공을 끌어안고 최초의 파충류처럼 태양에게 말을 걸었다: 우린 늘 태어나보지 못한 자들이고, 머리 타래는 잘라 반수(半獸)의 신(神)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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