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시선 446
안희연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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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희연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 2020

 

 

묘사보다는 진술과 서사에 중심을 둔 시가 많다. 이미지의 다채로움이나 깊은 상징이 추구하기보다는 문장과 문장이 만들어내는 긴장과 그 사이의 여백, 특히 마지막 문단이나 결구 끝에 여운을 남기는 시가 보인다.

 

‘검침원’이라는 시가 오래 기억에 남았는데, 검침원은 본래 가스의 누수를 탐지하는 직업인데, 이 시에서는 마치 나의 죽음을 예방하고 삶의 대한 희망을 부여하러 온 평범하지만 전지전능한 ‘신’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소하고 배려 깊은 말 한마디가 수십 알의 약보다 더 효과가 있을 때가 있다. 당장 어떤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심장 속에 오래오래 살아남아 나를 살게 하는 그런 문장처럼.

 

 

- 시인의 말

··· 아이의 엄마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혹여 오더라도 아주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서글픈 직감이었다.

그러나 아이이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아이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는 상상을 한다. 여름 언덕을 오르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머리칼이 흩날린단다. 이 언덕엔 마음을 기댈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없지만 그래도 우린 충분히 흔들릴 수 있지.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고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도 같다. 울지 않았는데도 언덕을 내려왔을 땐 충분히 운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이 시집이 당신에게도 그런 언덕이 되어주기를.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 검침원 102-103쪽

 

그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왔다/ 그것은 너무 검고 너무 무거워 보여서// 가방 속에 무엇이 담겨 있을지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미래가 담겨 있다고 해도 믿어질 것 같다// 늘 가지고 다니는 겁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때 나는 홀로 믿어지다,라는 말에 붙들려 있었는데// 믿을 수도 있었는데 왜 믿어진다고 생각했을까/ 어쨌든 그는 믿어질 것 같은 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집 안 구석구석을 살피며/ 가스가 새는 곳은 없는지 점검하였다/ 창문의 역할과 환기의 중요성에 대해, 창가에 놓인/ 창백한 식물의 이름이 마오리 코로키아라는 것도// 유난히 약한 녀석이에요 살아 있는데도 죽은 것처럼 보이죠// 늘 거기 있던 창문을 처음으로 들여다보았다/ 앞으로의 외출은 마음에 꼭 맞는 창문을 고를 때까지 계속될 것 같다// 나는 그에게 차가운 물을 건네며/ 그의 가방 속에 들어가 잠드는 상상을 했다/ 그는 무엇을 검침하러 온 것일까/ 여름이 어떤 형태로든 나의 안부를 물을 때// 조금 느슨하게 만들어보세요 손에 자꾸 힘을 주면/ 목을 감싸는 게 아니라 조르는 것처럼 느껴질 거예요/ 그는 거실 구석에 놓인 털실 뭉치와 뜨다 만 목도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완성을 바라는 마음이 거기 있다/ 너를 잃고 너를 잃고/ 죽지 않으려고 사다둔 것이었다

 

 

- 추리극 39쪽 부분

 

만년설을 녹이기 위해 필요한 건 온기가 아니라 추위가 아닐까/ 안에서부터 스스로 더 얼어붙지 않으면// 불 꺼진 창이 어두울 거라는 생각은 밖의 오해일 것이다/ 이제 내겐 아흔아홉마리 늑대와 한 마리 양이 남아 있지만/ 한 마리 양은 백마리 늑대가 되려 하지 않는다

 

- 자이언트 43쪽 부분

 

지금껏 왜 작다고만 생각했을까/ 올려다봐도 얼굴이 안 보일 만큼 큰 것일 수도 있는데// 쉬지 않고 움직이는 구름들/ 너머의 얼굴을 상상한다

 

-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52-53쪽

-

- 가끔의 정원 68-69쪽

 

꽃 없는 꽃도 꽃이라 부를 수 있을까/ 질문에 휘감기는 사이 한 소녀가 다가와 쪽지를 건넨다/ “이곳에 나를 묻어줘”/ 목은 선명하지만 얼굴이 없어서// 나는 자꾸만 소녀의 얼굴을 상상하게 되고/ 꽃은 꽃으로만 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 그의 작은 개는 너무 작아서 96-97쪽 부분

그는 개와 함께한 날들의 몇곱절을 지나 살아남았고/ 거의 모든 기억을 잃었으며/ 오직 도래라는 말만을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말이 둥글고 따스한 알 같다고 생각한다/ 기다리면 껍질을 깨고/ 무언가 태어날 것 같은 말// 그의 작은 개는 너무 커서/ 그의 하늘을 뒤덮고 있다/ 그의 슬픈 눈망울을 완성하려고/ 태양은 종종 등을 돌려 얼굴을 가린

 

 

- 앵무는 앵무의 말을 하고 100-101쪽

 

앵무는 앵무의 말을 가져본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앵무는 앵무의 말을 하고/ 앵무다운 색으로 빛나고/ 앵무만의 표정을 짓고/ 앵무의 울음을 운다// 나답게 우는 법을 몰라서/ 앵무의 울음을 따라 한다/ 앵무 앵무 울며 나를 견딘다

 

- 나의 투쟁 124-126쪽 부분

 

도움닫기와 점프/ 뜀틀을 뛰어넘는 법은 단순한데/ 왜 번번이 뜀틀에 주저앉고 마는 걸까// 겨울에서 겨울로/ 더 가파른 겨울로/ 양을 몰고 가는 상상을 한다// 늑대의 목에 걸린 방울을/ 미래라 부르는 사람이 되려고// 주저앉은 뜀틀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그래도 나는 사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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