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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열린 책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올레'는 제주 지방의 방언으로 길에서 집까지 연결된 아주 좁은 골목 길을 뜻한다. 다시 말해 집으로 가는 길이다. 저자의 전기적 사건과 작품집을 읽으며 '올레'라는 낱말이 떠올랐다.
열 살에 척추옆굽음증 진단을 받고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았고, 여러 번의 결혼과 이혼, 수술과 회복을 반복하면서도 끝끝내 죽는 순간까지 그를 지탱하게 한 버팀목은 글쓰기라는 사실을 그의 글을 읽으면서 느꼈다.
작가와 작품 속의 인물은 구분해야 한다지만, 이 소설집에서는 그런 구분은 무의미해 보인다. 작품은 다르지만 인물의 이름과 설정이 유사한 경우도 많고, 중심 인물들(대개 아이 엄마나 이혼녀, 작가, 강사)이 저자가 가진 다채로운 특성들을 표상하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그의 전기적
사실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이 작품집의 매력인지 단점인지 모르겠지만).
2차세계대전 이후 사회적 분위기, 미국과 멕시코, 칠레 등 스페인계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면 처음 몇 작품에서 묘사나 스토리가 잘 와닿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중후반으로 가면서 문체와 분위기에 적응하게 되면 특유의 섬세한 묘사와 특별한 반전이 없음에도 여운이 오래 남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거울 속에는 수만 갈래의 길이 있다 손때 묻은 소설의 귀퉁이처럼 접힌 길모퉁이를 들추고 들여다보면 푸른곰팡이 구름의 모서리에 걸려 있다 길은 미끌미끌한 욕망을 낳기 위해 억새의 머리카락을 쥐고 흔들며 가쁜 호흡으로 낯선 억양으로 바람을 호명한다 거울 속에 가득한 밑줄은 이마를 지나던 욕망이 바람에 베인 흔적 푸른 밤을 등에 태우고 망각의 강을 건너던 벌레는 어디로 갔을까 물음표로 끝을 맺는다고 문장이 늘 질문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저만치 멀어지는 공중의 말줄임표를 센다 입술을 꾹 다문 마침표들이 비상하는 순간을 다물어지지 않는 심장으로 응시한다 욕망을 한 삽 퍼낸 자리에 어느새 생긴 비웅덩이 다시 원점 그 한 점에서 모든 것은 시작되고 팽창하고 멀어지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그 한 점을 향해 순례자의 마음으로 거울을 닦는다 내 앞에 무엇도 없고 내 뒤에 무엇도 없다 보잘 것 없는 것은 없다 부르튼 거울의 테두리를 매만지며 울먹이듯 흥얼거리며 집으로 가는 길 자벌레 한 마리 찬란하게 부서진다 힘을 다해 꿈틀거린다
○ 루시아 벌린 소설집, 내 인생은 열린 책, 웅진지식하우스, 2020
- 역자 후기, 공진호, 「난파선 같은 인생, 카니발 인생」
루시아 벌린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 자살적 사랑과 추억, 덧없는 삶과 죽음, 고통과 우울, 중독,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로맨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리고 이 말들은 거의 언제나 유머가 부양한다. 371쪽
- “우편집배원.” 카산드라는 말을 고쳤다. “난 그사람을 보면 우울해져. 그 사람은 기계 같아. 일정이 매일 똑같아. 심지어 신호등이 바뀌는 시간까지 맞춘다니까. 그걸 보면 나 자신의 삶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서글퍼져.” 11쪽
- “괜찮아요.” “바보처럼 굴지 말고, 어서 벗어 물을 짜내.” 그들은 몸을 떨었다. 이가 서로 부딪쳤다. 아로모 꽃잎이 노란 모피처럼 그들의 알몸에 들러붙었다. 로라는 춥고 두려웠다. 욕정이 일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로라는 가슴을 애무하는 그의 은발을 입으로 붙들었다. 노란 아로모나무의 가장자리가 하늘에서 흔들거렸다. 놀라운 통증.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안드레스는 로라의 목에 입을 파묻고 속삭였다. 그의 숨결과 몸이 따뜻했다. 로라는 옷을 입으면서 다리에 묻은 번들거리며 김이 나는 정액을 보았다. 125쪽
- 세상에는 완벽한 소리라고 할 수 있는 특별한 소리가 있다. 테니스공이나 골프공을 제대로 때렸을 때의 소리. 플라이볼이 글러브에 닿는 소리. 케이오로 털썩 쓰러지는 소리의 긴 여운. 첫 큐로 당구공들을 완벽하게 흩어버릴 때의 소리를 들으면 현기증마저 날 정도다. 산뜻한 뱅크샷에 이어 공을 서너 개 살짝 비껴 치는 둔탁한 소리, 그리고 정면으로 부딪치는 소리. 초크를 감싸듯 잡아 큐에 대고 비트는 동작. 당구는 어느 모로 보나 에로틱하다. 음악이 고동치는 주크박스의 어스름 조명 속에서는 대개 그렇다. 300쪽
- 어렸을 때 나는 잠이 오는 순간을 알아차리려고 시도해보곤 했다. 하지만 가만히 누워 기다리다 눈을 뜨면 번번이 아침이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가끔 시도해보았다. (···) 내가 마흔 살을 넘겼을 때 처음으로 그 일이 일어났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밤이었다. 도로에서 비쳐드는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천장을 둥글게 쓸고 지나갔다. 이웃집 잔디의 스프링클러가 휙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알아차렸다. 잠은 차가운 홑이불을 덮어주듯이 조용히 다가와 내 눈꺼풀을 살포시 어루만졌다. 잠이 나를 취할 때 나는 그 잠을 느꼈다. 그러고는 아침에 기쁜 마음으로 잠에서 깼고 다시는 그 시도를 할 필요가 없었다.
죽음을 알아차린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파리에서 죽음을 알아차리는 일이 생겼다. 나는 죽음이 어떻게 엄습하는지 보았다.
- 우리 아들들이 보고 싶었다. 브루노와 부모님 생각에 슬펐다. 그들이 그리워 슬프지 않고 정말 그립지 않아 슬펐다. 내가 죽어도 그러리라. 3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