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영혼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9
정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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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 소설집, 완전한 영혼, 문학과지성사, 2018(재판)(초판은 1992)

 

소품, 단편 그리고 중편을 묶은 정찬의 소설집이다. 중심은 맨 마지막에 실린 ‘얼음의 집’이다. 시기적으로도(일제강점기), 분량 및 무게감으로도 이 작품을 먼저 읽어야 한다. 권력과 인간, 권력과 종교, 권력과 사랑, 권력과 역사, 권력과 정치 (···) 권력의 문패를 단 대문을 열고 방을 천천히 둘러본다. 이 방들은 신기하게도 벽에 의해 구획되어있지 않고 마치 빈 소금 창고에 들어간 것 같은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독립적이면서도 거대한 끈으로 묶인 듯한 막막함.

 

이 소설집을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일제강점기, 해방전후, 6.25. 4.3. 유신, 80년 5월 광주의 액자들을 보게 된다. 어떤 그림 앞에서는 오래 머물렀고, 뚫어지게 그 속의 집과 길과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게 한다.

 

 

* 얼음의 집

 

- 천황의 죽음

 

1922년 12월, 내 나이 열세 살에 삼촌이 있는 일본으로 건너감.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 대역사건

 

내 나이 17세였던 1926년 9월, 나는 무정부주의자들의 그룹에 들어갔고, 거기서 정준영과 운명적인 해후를 했다. 145쪽

 

 

정준영은 후미코의 뼈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지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인 동시에 가장 가벼운 것이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뼈를 입으로 가져갔다. 혀가 뼈에 닿았다. 그는 뼈를 핥기 시작했다. 천천히 정성스럽게 핥았다. 이 뼈는 그녀의 영혼이며, 이제 그녀의 영혼은 머나먼 여행을 할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기억과 완전히 끊어진 곳으로의 유영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물질, 이 세상의 냄새, 이 세상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나는 혀로 뼈를 씻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완전히 지움으로써 후미코의 영혼이 평화로운 유영을 할 수 있도록. 157쪽

 

- 황금 사다리

 

 

“권력자이면서도 권력의 운명에서 벗어난 이가 천황이네. 하야시는 자신의 내면을 천황의 내면과 일치시키려 했네. 내면의 일치란 존재의 일치네. 이 일치를 통해 천황이 되고자 한 것이네.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천황을 향한 걸음이었네. 이것이 바로 그가 만든 사다리의 모습이었네. (···)” 220쪽

 

“하야시의 사상은 이러한 일본의 권력자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자 부정이며, 냉소며 초월이네. 하야시는 박해받은 자의 고통과 비명은, 그 살과 뼈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네. 하야시는 사상으로써 일본의 권력을 냉소했고, 실천으로써 천황을 향해 다가갔네. 인간에게는 종족 보존의 본능이 있듯이 사상을 보존하려는 본능도 있네. 그 사상의 혈맥을 하야시는 자네에게 잇고자 한 게 아닐까.” 225쪽

 

- 얼음의 집

 

내 삶의 공간이 어떤 곳이지 너는 알 것이다. 얼음의 공간이었다. 얼음은 따뜻함이 조금만 스며들어도 자신을 지탱하지 못한다. 사랑이 스며들 수 없는 곳이야말로 내가 구축한 얼음의 집이었다. 그런데 그 속으로 작은 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종이비행기처럼 작은 새였다. 그 새를 바깥으로 쫓아냈어야 했다. 생각을 해보라. 새를 내버려두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새는 차가움에 체온을 빼앗길 것이며, 마침내 얼어 죽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얼음의 집은? 새의 따뜻함이 얼음 속으로 파고 들어 결국 집을 허물어뜨릴 것이다. 새는 죽고 얼음의 집은 파괴된다. 234쪽

 

아들은 쓰라린 상처 속에서 자라고 있는 증오의 씨앗이 칼이 되어 내 가슴에 잫기 전에 떠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아들이 살아 있는 한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으며, 증오의 씨앗은 칼이 되어 내 가슴을 찌를 때까지 성장을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날 (237쪽)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내 살을 향해 달려왔던 칼은 바로 아들의 칼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언젠가 나를 찾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아연했다. 10년 동안 아들의 칼을 기다리고 있었던 스승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238쪽

 

 

운명은 나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갔다. 아들이 열여섯 살 되던 해 여름, 어처구니없는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다. 병원에 달려갔을 때 몸은 싸늘히 식어 있었다. 슬프지 않았다.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내의 비통 앞에서 나는 안도하고 있었다. 등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없어진 것처럼. 나의 감정이 온당한 것인지 회의하기도 했지만 온당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권력의 법칙 앞에 인간의 감정이란 참으로 하잘것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떠한 이성도, 도덕도, 정서도 권력이란 공간 속으로 들어가면 허공에 떠도는 티끌이 되어버리니까. 나는 운명에 순응했다. 철저히. 스승은 운명을 거스르다가 추락했지만 나는 냉혹히 운명을 실천했다. 243쪽

 

* 완전한 영혼


 

* 패랭이꽃


 

* 신성한 집


 

* 길 속의 길


 

* 영산홍 추억


 

- 아버지가 나에게 했던 마지막 말, 어둠 속에서 홀로 앙상한 뼈처럼 서 있는 말이었다.

 

“그동안 나는 역사라는 말을 수없이 해왔고, 또 들어왔지만, 그토록 무게가 실린 말은 처음이었다. 이데올로기는 관념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인간의 운동에 의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힘, 즉 권력으로 전화된다. 그러므로 역사란 이데올로기를 권력화하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살아 있는 생명체의 모습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권력화로의 운동 때문이다. 역사가 수레라면 권력은 바퀴이며, 인간은 이 바퀴를 굴린다. 역사에 철저히 복무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권력화하는 운동에 철저히 복무함을 뜻한다. 철저한 역사의식은 철저한 권력화 의지를 뜻한다.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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