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김숨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억압의 뿌리’(김숨 소설,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문학동네, 2019)


신춘문예 등단작과 문예지 등단작 그리고 문학상 수상작을 작가가 개작한 작품집이다. 나란히 놓인 중편, 단편을 읽으니 작가의 말처럼 하나의 뿌리가 느껴진다. 깊숙이 파인 구멍 속에 손을 넣고 느낄 수 있는 최초의 감각은 촉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후각. 마치 연작 같은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와 ‘뿌리 이야기’. 그리고 엄마들이 내뱉는 발화는 자연적인 발성이 아니라 뭔가 억눌리고 억압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서사보다는 이미지와 대화가 풀어내는 정서가 매력이다.


*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발표당시 제목 「느림에 대하여」)



“빠른 건······ 나무를 버리고 가는 거란다.” 12쪽

“발이 뿌리로 자라면 좋겠어요.” 14쪽 (오빠의 말)



* 뿌리 이야기 - 『작가세계』2014년 여름호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질문은 그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초를 든 그의 손이 떨렸다. 그 바람에 촛농은 포도나무 뿌리를 비껴 그의 발동으로 떨어졌다.

그는 혹 한없이 더디고 긴장된 ‘점묘의 시간’을 가학처럼 즐기기 위해 촛농을 고집하는게 아닐까. 69쪽


- 자연물인 뿌리가 예술적 오브제로 승화하기 위해 거치는 통과의례들 중 가장 단순하고 의미심장한 의례를 그는 ‘못박힘’이라고 했다.

패널이라는 제한된 세계에 뿌리라는 자아를 고정시키기 위해 ‘못박힘’이라는 의식을 치르는 거야. 자아가 옴짝달싹 못하게. 82쪽


- 초등학교 삼학년 여름방학 때였어. 마당 대문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화분이 내 눈에 들어왔어. 나는 일기를 쓰다 말고 마루에서 내려가 화분으로 걸어갔어. 속이 꽤 (84쪽)나 깊던 갈색화분이었어. 나는 양말을 벗고 화분 속에 두 발을 집어넣었어. 어머니가 날 보고는 나오라고 애원했지만 나는 계속 그렇게 화분 속에 두 발을 담그고 서 있었어. 내 발이 뿌리로 자랐으면 했어. 내 발이 날 아무데로도 데려가지 못하게. 85쪽



- “생의 마지막 순간에 고모할머니가 손에 꼭 그러잡고 있던 게 뭐였는지 알아? 내 손이었어. 그녀가 양로원에서 돌아가시던 밤, 그녀의 손이 내 방에 날아들어 이불을 들추고 더듬어오는 걸 나는 다 느끼고 있었어. 내 손을 찾아 더듬더듬 더듬어오는 걸······” 108쪽



* 슬픈 어항 -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 수상작(발표 당시 제목 「중세의 시간」)



- “금붕어야, 아버지는 날 사랑했어. 어머니는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았지. 나는 그 벌을 받고 있는 거야.”

어머니가 모르는 게 있다. 그건 내가 아니었더라도 아버지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내게 사랑을 빼앗겼다고 믿고 있지만, 그녀에게는 빼앗길 사랑이 없었다.

그 어느 날 밤, 날 끌어안으며 아버지가 속삭였던 것이다.

“······사랑할 수 없는 여자의 몸에서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너무 고통스러워 네가 죽기를 바랐다. 너는 죽지 않았고, 나는 널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간혹 궁금할 때가 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 둘 중 누구에게서 도망친 것인지. 13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