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있다 - 윤동주 산문의 숲에서
김응교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늘이 이마까지 바짝 다가와 툭 툭 수박씨를 내뱉을 때 번져가는 어둠에 물들지 않도록 이내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전갈의 등을 타고 세제곱의 발걸음으로 계단을 무너뜨리며 쫓아오는 우레에 급한 마음은 포도(鋪道)에 박힌 별의 모양으로 나아갈 길을 점치어 봅니다

 

남쪽에 고향이 있습니다 그 고향의 하늘에 두고 온 참외처럼 생긋이 웃는 애인이 있습니다 토마토를 도마도, 장어를 짱어라 말하는 애인입니다 복숭의 솜털 같은 애인의 눈망울을 바라볼 때면 연륜을 알 수 없는 녹나무 한 그루가 맑은 그늘을 공작의 날개처럼 펼치고 있습니다

 

나는 별들의 폭우를 피해 나무로 들어갑니다 동굴 같은 여름 속에는 폭염을 피해 흘러든 무궁무진한 별똥의 숲이 있습니다 극단의 마음을 끌어안고 사는 나무는 어쩌면 내가 잊고 살던, 내게서 떨어져 날아간, 언젠가 내가 나에게 버린, 내게 스며든 애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무는 보고 싶지 않은 내 얼굴을 가리는 그늘막이자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보지 않게 해 주는 가림막입니다

 

나는 숲에서 별스러운 관통을 꿈꿉니다 뒤로 한 걸음 혹은 앞으로 세 걸음의 봄을 생각합니다 빗금처럼 차창이 비틀거립니다 한 평 남짓 내 그늘에 낀 시간의 녹 위로 투명한 개미들이 지나갑니다 고요한 레일 위에 펼쳐진 소리의 그물에 몸을 던져 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