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이마고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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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통일성과 이성과 감정 심지어는 우리의 행동까지도 기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완전한 기억상실뿐이다. 그것만이 내 삶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다.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 루이스 부뉴엘

p.53

 

나이가 들면 중풍이나 노쇠, 뇌 손상 등으로 그때까지의 생활 즉 고도의 정신 생활이 예상치 않게 빨리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겪는다해도 자신이 인생을 살아왔고 자신의 등 뒤에 과거가 있다는 기억은 남으며, 그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적어도 내가 뇌를 다치기 전 또는 발작을 일으키기 전에는 힘껏 노력하면서 살았다.'라고. '인생을 살았다'라는 의식은 인간에게 때로 위안을 주기도 하고 때로 쓰디쓴 회한을 주기도 하지만, 역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이러한 의식조차 없어진다.

p.88

 

사물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것이 너무도 단순하고 친수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늘 눈앞에 있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으로 탐구해야 하는 것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법이다.

- 비트겐슈타인

p.93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中

 

 

+) 이 책은 작가가 말한 바 있는 '주체성 신경학'에 대한 연구서이다. 정확히 말하면 임상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환자들은 그들이 지닌 병 때문에 괴롭기도 하고 때로 즐겁기도 하다. 또한 본인의 병을 알고 있기도 하고 그것이 병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기도 한다. 그런 부분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줄이기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비교적 긍정적으로 읽게 된다.

 

'상실, 과잉, 이행, 단순함'의 큰 테마 아래 여러 환자들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환자의 유형에 따라 다르겠으나 무엇보다 이들이 겪고 있는 병의 원인이 무엇일지 무척 궁금했다. 그들이 병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지만 원인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도 필요하리라 싶다. 가벼운 마음으로 심리학에 대한 책을 읽어보고 싶다면 권한다. 단, 사례 중심이기 때문에 이론적인 면에 관심을 둔다면 흥미가 조금 떨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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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집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8
이혜경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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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참 우스워. 자기가 생각한 것만큼만 보려고 해.

 사람의 생각은 자기가 몸담은 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 생각에만 골몰한 사람이, 남의 이야기를 듣다가 제 생각과 잇닿은 곳에서만 반응해 엉뚱해 보이듯,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온 은용에겐 모든 게 살림살이와 결부되었다. 날씨가 좋으면, 빨래가 잘 마르겠구나. 텔레비전 뉴스에서 식중독 이야기가 나오면, 당분간 어패류는 사지 말아야겠구나.

p.77

 

“은용 씬 간이역 같아요. 행복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죠. 행복한 사람들은 급행 열차를 타니까 간이역을 휙 스쳐버려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완행 열차를 타고 다녀요. 그러다가 아무도 없는 간이역을 보고 울기도 해요. 그거, 알아요?”

p.119

 

지난 봄에 투신한 여학생이 남긴 유서의 일부분.

‘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 없는 자, 부끄럽게 죽을 것.

살아감의 아픔을 함께 할 자신 없는 자, 부끄러운 삶일 뿐 아니라…….

이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부당함에 빼앗김의 방관.

더 보태어 함께 빼앗음의 죄, 더 이상 죄지음의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

- 고(故) 박혜정의 유서에서

p.137

 

세상이 바뀌었다고 권력 쥔 사람들 마음이 바뀔 줄 아느냐. 너는 배웠다고 야당 좋아하는 거 같더라만, 야당이 정권 잡으면 뭐냐. 그게 바로 여당 아니냐. 힘 가진 사람들 마음은 같은 골로 흐르는 법이다. 바쁜 것 같으니 그만 가봐라.

p.208

 

 

이혜경, <길 위의 집> 中

 

 

+) 이 소설은 1995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고, 2004년 독일 '리베라투르 상' 장려상 수상한 작품이다. <길 위의 집>은 일종의 가족 소설로 1970년대부터 약 20여년 동안 한 가족이 겪는 사랑과 갈등, 분노와 절망, 그리고 화해를 그린 작품이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억압받고 성장한 아들들과 딸의 모습을 차분하게 그려낸다. 외출했다가 늦은 어머니에게 짜장면 그릇을 던져버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들 '윤기'는 과거의 큰 상처로 남아 있고, 그러한 모습들이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드러나 대학생이 된 뒤로 두 사람은 계속 부딪친다.

 

그에 비해 비교적 순종적인 큰 아들 효기와 셋째 인기는 아버지에 순응하며 지내는 듯 하지만 이들 역시 순간순간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반항심이 표출된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국의 가부장적 인물로 어머니에 대한 억압과 자식들의 삶을 좌지우지 하려는 면이 두드러는 인물이다. 글을 읽으면서 강압적인 아버지의 모습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은용은 집에서 살림을 맡아하는 인물이다. 은용의 친구가 은용에게 무엇이라도 배우라고, 그렇지 않으면 뒤떨어지는 것 같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나는 깊이 공감했다. 살림하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나, 은용 스스로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갈망하듯 그런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접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을 때, 한심한 남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시원하게 욕을 해대는 은용의 모습에서 억눌려 있는 분노와 욕구의 표출을 보았다. 남자에게 억눌린 채 살아가는 여자의 모습을 한 가족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실상 그 뒤에는 국가, 사회, 관습, 편견 등이 존재했다. 이 작품 속 여성들의 모습은 언제나 자신의 뜻대로 살지 못했다.

 

윤기가 좋아하던 여자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 윤기와 결혼한 여자는 매를 맞으며 바람 피우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으며, 은용과 은용의 어머니에게 자유란 빨래를 널며 보는 하늘 정도였다. 이 소설은 억압받는 여성의 모습을 비롯하여 가부장적 사회에서 답답하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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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뜬한 잠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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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

 

깜빡 나를 잊고 출근버스에 올랐다

어리둥절해진 몸은

차에서 내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방문 밀치고 들어가 두리번두리번

챙겨가지 못한 나를 찾아보았다

화장실과 장롱 안까지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집안 그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몇장의 팬티와 옷가지가

가방 가득 들어 있는 걸로 봐서 나는

그새 어디인가로 황급히 도망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쉬고 싶어하던 나에게

잠시 미안한 생각이 앞섰지만

몸은 지각 출근을 서둘러야 했다

점심엔 짜장면을 먹다 남겼고

오후엔 잠이 몰려와 자울자울 졸았다

퇴근할 무렵 비가 내렸다

내가 없는 몸은 우산을 찾지 않았고

순대국밥집에 들러 소주를 들이켰다

서너 잔의 술에도 내가 없는 몸은

너무 가벼워서인지 너무 무거워서인지

자꾸 균형을 잃었다 금연하면

건강해지고 장수할 수 있을 것 같은 몸은

마구 담배를 피워댔다 유리창에 얼핏

비친 몸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옆에 앉은 손님이 말을 건네왔지만

내가 없었으므로 몸은 대꾸하지 않았다

우산 없이 젖은 귀가를 하려 했을 때

어딘가로 뛰쳐나간 내가 막막하게 그리웠다

 

 

박성우, <가뜬한 잠> 中

 

 

+) 이번 박성우의 시집은 <거미>보다 오히려 더 느슨해진 느낌이다. 시라기 보다 유년시절을 회상한 단상 정도라고나 할까. 사물에 대한 응시나 과거 회상, 추억 회귀의 자세는 좋지만 그 정도에서 그쳐 버렸다. 시적 대상에 대한 사유가 부족한 듯 관찰과 회상만이 둥둥 뜬 것 같다. 소통 불가능한 작품들이 많은 최근의 현대시 경향에 비한다면 독자 입장에서 읽기에 부담없는 시집이 되겠으나,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존재하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그의 시를 읽은 한 시인이 시는 사치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평했다. 그것에는 공감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것이 또한 수수하다는 것은 아닐터다. 담백한 맛이라기 보다 오히려 싱거운 맛이 느껴지니 말이다. 박성우의 다음 시집에서는 생각이 깊이가 더 심화된 작품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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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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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인물을 중심으로 가계 구도를 잘 알고 있어야 이해하기가 쉽다. 왜냐하면 5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이 겪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더군다나 그들의 이름이 선대의 이름을 따라 짓는 경우가 많아서 이름을 헷갈리기 시작하면 이 책을 읽는 것이 곤혹스럽다. 하지만 이 책은 5대에 걸린 가족사의 고통과 절망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으며, 적나라한 장면 묘사는 사실적으로 사건을 그려낸다.

 

이 작품은 부엔디아 가문의 선조가 마콘도 마을을 건설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질서 있고 열심히 일하는 곳이었던 마콘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시들이 얼음, 자석, 확대경, 사진기와 같은 문명 세계의 발명품들을 마콘도로 가지고 오면서부터, 마을은 점차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간다. 순수한 마콘도 마을은 현대 문명을 신기해하며 가까입 접할수록 몰락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국가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내란을 비롯하여, 외국인들이 이 지역에 농장을 건설하여 노동자 착취가 이뤄진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속에서 그들의 욕망과 본능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서슴지 않게 된다. 소설 중반부를 넘어서서 선대의 이름을 따라 후대에 이름을 짓는 부엔디아 사람들을 보면서 역사가 반복되듯, 운명이 반복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두려웠다.

 

이 소설은 긴 장편소설이고 인물에 유의하여 읽어야 하는 피곤한 점이 있지만, 어려운 내용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아니기에 천천히 읽으면 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명의 등장인물이 부담스러운 독자라면 좀 더 적은 분량의 소설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등장인물이 적은 작품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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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꾼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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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마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기억하는 거에요.”

p.88

 

게다가 동화책을 사주면서 할머니는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밑줄을 그어두라고 일러주었다. 그건 할머니가 백과사전을 읽을 때 익힌 습관이었다. “나중에 커서 밑줄 그은 부분을 다시 읽어보렴. 그러면 네가 얼마나 자랐는지 알 수 있을 거야.”

p.93

 

내가 배낭에 들어가자 아버지가 얼른 배낭 입구 끈을 조였다. “답답해요!” 소리치는 나에게 아버지는 짐이 되는 상상을 해보라고 했다. 나는 즐거운 일만 상상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왜 짐이 되는 상상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얼른 밖으로 나가고 싶어 알았다고 대답했다.

p.138

 

윤성희, <구경꾼들> 中

 

 

+) 몇 년 전 본의 아니게 소설을 손에 들기가 어려웠던 때, 나로 하여금 '소설'을 다시 한번 되새겨준 소설이 윤성희의 소설집이었다. 윤성희가 썼던 한 편의 단편 소설을 읽게 되면서 그녀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그 견고한 구성에 놀라워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윤성희의 첫 장편소설을 읽고 나는 계속해서 감탄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견고한 짜임새의 플롯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나는 작가의 성실함과 끈질김이 스토리와 플롯이 제대로 갖춰진 소설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윤성희 작가는 언제나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이번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말하면 한 가족의 모습을 전체 틀로 잡고 그들 개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이다. 물론 중간중간 그들과 얽힌, 아니, 그들이 '구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구경'이라는 단어가 자칫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이 작품에서 구경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과 연계하여 생각해야 한다.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보고, 자신의 삶을 통해 타인의 삶을 본다. 또한 같은 사건이었으나 다른 결과를 맞이할 수 있으며, 예상했던 뻔한 결과를 한 순간에 뒤집어버릴 수도 있음이 인생임을 알게 된다.

 

어이 없는 사고로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정의로운 행동으로 또 한 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그들 가족은 내면의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기 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극복한다. 비슷한 삶을 발견할 때까지, 두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여행을 떠나거나, 회사를 관두고 사돈 댁의 족발 장사를 배우거나, 군대를 가거나, 죽은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밥을 떠놓거나 등등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 죽은 가족을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이 잊지 않으려는 것이든, 죽음이라는 것을 인정하려는 것이든 중요하지 않다. 다만, 가족들은 가족이었던 그들을 어떤 기억으로든 남겨두려 한다.

 

나는 이 소설을 보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비롯하여 사람들의 삶이란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또 비슷한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삶이란 그렇게 조금은 다르면서 조금은 비슷한 역설적인 것이 아닐까. 긴 소설을 탄탄한 플롯으로 전혀 지루하지 않게, 전혀 허술하지 않게 쓴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모처럼 성실하고 진지한 장편소설을 읽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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