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72
유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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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中

 

 

둘은 서로의 기억 저편에 닫아둔 다락방에 대해 묻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욕망이란, 서로의 뇌수 뚜껑을 열어 그 은밀한 다락방을 들여다보고, 그 공간을 완벽하게 지배하고픈 것일지도 모른다 그 다락방조차 햇빛 가득한 창문을 내고 자신의 살림살이를 들여놓고 싶다는 욕망,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해될 수 있게, 다락방을 털어 재빨리 케케묵은 상처를 윤색하고, 비밀의 서랍을 정리해보지만, 그래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숨길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아니라, 원래 침묵의 편에 서 있는 것들이다 ( 두 사람 사이엔 침묵의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지금 이 순간의 '불타오름', 그리고 나머지는 온통 무심한 어둠, 그 불꽃의 저편은 내 격정의 영토와는 무관하다 그 어둠 속에, 내 불타오름의 '타인'인 내가 살고 있고, 그녀의 불타오름의 '타인'인 또 다른 그녀가 살고 있다

 

유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中

 

+) 이 시집을 읽으면서 문득 시의 '자유로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어째서 시가 자유롭다는 것을, 지상에서 멀리 떨어진 위치의 줄타기를 하는 기분일까. 어떤 작품은 시의 형식을 완전히 파괴하고 있는, 산문시도 아닌 마치 소설의 한 페이지같은 작품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형식적으로 연구분을 했을 뿐, 읽고 나니 몇 편의 산문을 섭렵한 것도 같다.

 

그러나 분명 그의 작품에는 시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물론 문학을 고상한 것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읽기에는 거슬릴 수 있는 표현도 있고, 이런 소재를 어떻게 쓰나 하는 대중적인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시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농후하다. 아, 이 사람은 시를 가슴에서 놓아본 적이 없구나, 싶었다.

 

그의 표현대로 "인생이라는 환각"에 대해, 그는 시로서 응답하고자 했다. "재즈"로 삶을 그리고 시를 만들고 길을 걸어간다. 이 시집을 좀 더 이해하려면 대중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인간적인 고정관념"뿐만 아니라 시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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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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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한테 이런 짓을 하고도 순순히 넘어갈 거 같아, 엉?"

"치료인 걸 어쩌나, 하는 수 없지." 이라부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치료는 무슨 치료야. 환자 결박시키고 주사나 놓는 주제에."

"이런 치료도 있는 거지, 뭘. 고름은 째서 짜버려야 빨리 낫는 법이야. 피도 조금 같이 나오긴 하지만."

                                                                        「고슴도치」

 

"저질러버리면 파괴충동은 곧바로 사라질 거야. 그게 마지막 목표니까."

"뻔한 속셈 다 알아. 날 부추겨서 실은 니가 하고 싶은 거겠지."

"인생, 길지 않다. 지금 당장 내뱉어야 할 걸 쏟아내지 못하면."

                                                                    「장인의 가발」

 

"소설을 쓰려고 하면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다 토해요. 점점 더 심해진다니까욧."

"쉬는게 가장 좋긴 한데."

"그런 한가한 소리 하지 마세요. 매달 단편 두 개는 마감을 해줘야 하고 장편 연재도 있단 말이에요."

"시간을 못 지키면 어떻게 되는데?"

"못 지키면......." 아이코는 말끝을 흐렸다. "신인들 예비 원고를 싣는 경우가 많겠죠."

"참 나, 그럼 백지로 나가는 것도 아니네. 그러면 된 거지."

                                                                       「여류작가」

 

 

오쿠다 히데오, 『공중그네』 中

 

 

+) 전철에서 이 소설을 읽으며 키득거렸다. 어떤 깊이 있는 내용이 아니라, 정말 내게도 '이라부' 선생님처럼 편하게 살고 싶단 마음때문이었다. 어린 아이같은 이라부의 언행은 환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어쩌면 그것이 거짓이 섞이지 않은 순수함 자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유쾌한 소설이다. 읽고 나면 마음이 제법 편해진다.

 

한때 정신과 의사를 꿈꾼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 상상속의 인물이 '이라부'다. 환자들의 강박증을 약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게 해주는 의사. 마음을 치료하는 사람이 진정한 정신과 의사가 아닐까.

 

인간은 대부분 한 두가지의 강박증을 갖고 있다.(나 또한 그렇다.) 그것을 모르는 척 살아가는 이도 있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으며,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이 소설은 어느 누가 읽어도 재밌있는 작품이다. 강박증에 대해서 가볍게 웃어넘길 기회가 아닐까 싶다. 

 

'인생 뭐 별거가, 까짓꺼 인생 한방이라는데.'

이라부 선생의 생각이 그 말 한 마디로 요약되지 않을까 싶다. 편하게 살자.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

 

어쨌든 나도 이라부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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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 - 철학 논고 비트겐슈타인 선집 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 책세상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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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도대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
 이 책은 그러므로 생각에 한계를 그으려 한다. 또는 차라리, 생각이 아니라 사고의 표현에 한계를 그으려 한다.

                                                     

              

 4. 003     철학적인 것들에 관해 씌어진 대부분의 명제들과 물음들은 거짓말이 아니라 무의미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런 종류의 물음들에 대해 결코 대답할 수 없고, 다만 그것들의 무의미성을 확립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자들의 물음들이나 명제들은 대부분 우리가 우리의 언어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그것들은 선(善)이 미(美)보다 다소 동일한가 하는 물음과 같은 종류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문제들이 실제로는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4.1212     보여질 수 있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

                                                                        

 

5. 61     논리는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 ; 세계의 한계들은 또한 논리의 한계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학에서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즉 이것과 이것은 세계 내에 존재하고, 저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외견상 그것은 우리가 어떤 가능성들을 배제한다고 전제하게 될 터인데, 이는 사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논리는 세계의 한계들을 넘어가야만 할 테니까; 요컨대 만일 논리가 이 한계들을 다른 쪽으로부터 고찰할 수 있다면 말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도 없다.

 

 

6.43     선하거나 악한 의지가 세계를 바꾼다면, 그것은 단지 세계의 한계들을 바꿀 수 있을 뿐이지, 사실들을 바꿀 수는 없다. 즉 언어에 의해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을 바꿀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서, 그렇다면 세계는 선악의 의지를 통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세계는 전체로서 감소하거나 증가해야 한다.

      행복한 자의 세계는 불행한 자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이다.

 

 

6.522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中

 

 

+)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를 읽으면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흥미로웠다. [논고]는 [철학적 탐구]와는 다른,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저작이다. 그의 초기 세계관이 드러난 책인데, 이것만 읽자고 들면 복잡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하며 읽어야 한다. 

 

가볍게 참고 서적들을 훑어보고 읽어보면 그의 논리에 빠져들게 된다. 억지스럽기도 하지만, 제법 새로운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글쓰기 방식은 독특하다. 나름의 체계일지는 모르나, 숫자로 내용을 정리하고, 그 숫자에 맞춰 자신의 주장에 따른 근거를 계속 덧붙이는 방식이다. 정리할 수 없는 것들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기존의 철학이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해결 자체의 무의미함을 이야기하며 '이론'이라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시각은 새로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비엔타 학파의 지적대로 비트겐슈타인이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자신의 철학을 이렇게 글로 체계화시키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싶다. 또 하나의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니까.

 

어쨌든 [철학적 탐구] 읽기를 시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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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275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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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한가

옅은 하늘빛 옥빛 바다의 몸을 내 눈길이 쓰다듬는데

어떻게 내 몸에서 작은 물결이 더 작은 물결을 깨우는가

어째서 아주 오래 살았는데 자꾸만 유치해지는가

펑퍼짐한 마당바위처럼 꿈쩍 않는 바다를 보며

나는 자꾸 욕하고 싶어진다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해만 가는가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中

 

+) 시인은 말한다. "지난 세월 씌어진 것들을 하나의 플롯으로" 엮어 "해묵은 강박관념"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나는 반대로 말하고 싶다. 그 안에 갇혀 있는 관념들을 엮어 플롯으로 만들었다고.

 

125편이나 되는 시는 연작시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우주적 구성으로 보았는데, 육체와 정신을 우주, 그러니까 자연의 테두리 안에 위치시키고 있다. 시인에게 해나 나무, 바다 등은 자연 그 자체라기 보다, 화자의 육체 혹은 정신과 맞닿은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몸"에 흐르는 "피"는 인간의 육체이자, 우주적 존재인 자연의 일부를 표상하기도 하며, 물상이 아닌 정신(인간의 내면 심리 및 가치)이기도 하다. 이는 앞서 언급한대로 육체와 정신을 자연이라는 원형상에 두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묘사들로 증명된다.

 

125편의 시에 숫자와 제목이 붙어있다. 그것은 마치 대화형식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자신과 타인과의 대화라기 보다, 자기 스스로 자신과 나누는 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면을 발견하기 위해 애쓰는 태도가 아니라, 이미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것을 바탕으로 타인을 짐작해보는 것이다. 그의 눈에 비친 자연의 변화들은 그런 내면 심리를 조망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치밀한 묘사 뒤에 깔린 비교적 가벼운 깨달음들이었다. 물론 시가 반드시 교훈적일 필요는 없지만, 마치 일기장의 글귀들처럼 느껴지는 시구절들은 시를 깊이 있게 끌어당기지 못한다. 그러나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구절들은 분명히 있다("소금쟁이 / 떠 있는 수면의 안간힘으로 / 너를 견뎠다, 피붙이여")

 

전체적으로 시의 음수율과 음보율이 고른 편이라, 읽기에 쉬운 편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시인이 의도한 것인지도 모르나, 짧은 시편들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읽는데 멈추지 않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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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랜덤 시선 1
최하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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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이 날리다 말고

 

 

눈발이 날리다 말고 바람이 일어난다

 

마른풀들이 달린다 산 아래로 나는 빠져나간다

 

길 위에는 네가 남긴 시간들과 너를 여읜 통증이

 

뻗쳐 있다 나는 다리 건너 서울상회를 지나 삼거리로

 

가지만 집들은 꼭꼭 대문이 잠겨 있고 개들도 짖지

 

않는다 개들은 좀처럼 짖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정배리 쪽으로 간다 언덕 위 나무들은 숨죽인

 

소리를 하고 나는 무엇 때문에 숨을 죽이고 있는지 그럴 이유라도 있는 것인지

 

묻지 않는다 아직도 해는 공중에 떠 있고

 

그림자들은 흔들리고 나는 사랑이 없는 길 위에

 

서성이고 있다 시간이 서성이고 있다

 

 

최하림,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中

 

 

+) 이 시집에서 '시간'은 포착되는 순간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 풍경이 시집 전체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건 단순한 묘사가 아니다. 그 속에는 '시간'과 '언어'가 숨어 있다. 시인이 언급하는 시간은 과거를 비롯하여, 현재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있다.("시간들이 날아간다 나는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 오늘은 어린 시절의 일들까지도 송구스럽고 길 떠난 // 사람들이 걱정스럽다"[공중으로 너풀너풀 날아간다])

 

시간은 개인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화자의 기억 속에서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시간은 "우리"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움직임은 역동적이라거나 활동적인 것은 아니지만, 한 걸음씩 나아가기 시작하는 차분한 일렁임 같은 것이다. 마치 잔잔한 파도가 천천히 일렁이기 시작하 듯 말이다.("시간들은 거기 그렇게 돌과 같이 // 나둥그러져 있을 뿐..... 시간의 배후에서는 밤이 일어나고"[십일월이 지나는 산굽이에서])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일 수 있는 것은 "매일같이 우리가 보고 마시던 시간들"[K와 함께]이기 때문이다. "너"와 "나"를 이어주고 있는 것은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는 그것이 풍경 속으로 스며들면서 장면 장면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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