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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김현영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월
평점 :
품절
어른이 된다는 것은 두려움이 사라지는게 아니었다. 혐오가 느는 것일 뿐이었다. 혐오감 때문에 무엇이든 쉽게 죽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뭐든 자세히 볼 수 있는 눈을 갖는다거나, 그래서 자기가 보는 대상에게서 공포를 느끼게 되길 그가 원한 적은 물론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그 눈은 그의 것일 뿐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 [그날 놀이터는 터이 비어 있었다] p.43
아버지는 그동안 자신을 출세시켰던 노력이 이제 별볼일 없어졌음을, 세상이 달라졌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모든 잘못은 항상 여기가 아닌 저기에 있었다. 그놈의 '저기'를 탓하느라 아버지는 자신이 얼마나 폼 안 나는 인간이 되어가는지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애완견] p.83
"예술가는 상상력을 갖고 태어난 검객이다. 상자 뚜껑에 못 하나 박을 줄 모르는 사람은 여러 가지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제대로 된 예술가라면 자기 구두 밑창을 갈 줄도 알아야 하고 사막에 갖다 놓아도 제 집을 지을 줄 알아야 한다. 소위 문명-고갱은 이 말을 사용할 때면 침을 뱉었다-에 의존하는 화가는 그의 현혹된 상상 속에서만 자유로울 뿐이다 ."
- [아이콘이 있으세요] p.134
난 결혼이 싫어. 당연히 결혼하고 싶지도 않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결혼하고 싶은 게 아니라 결혼해버리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결혼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잖아.
- [창백한 아프리카] p.226
김현영, <냉장고> 中
+)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세대라고 언급했던 90년대의 X세대를 지칭하는 것 같다. 그때는 갑작스럽게 컴퓨터 통신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온라인에서의 만남과 온라인에서의 삶에 관심이 증가한 시기다. 작가는 그 시공간의 사람이 갖고 있는 욕구, 욕망에 주목한다. 이들이 접하는 문명의 도구는 욕망을 해결하는 동시에 욕구를 유발하게 만든다. 문물이 갖는 역설적인 힘으로 사람들이 겪는 혼란을 보여준다.
구세대와 신세대의 대립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유도한게 아니다. 문명을 급격히 받아들이느라 자기 자신 조차 돌보지 못하는 신세대들의 방황을 제시하며 그 너머로 그들을 닥달하는 보수적인 구세대를 등장시킨다. 그들은 대부분 어머니, 아버지가 된다. 그러므로 집 혹은 가정이 평화롭고 아늑한 공간이기 보다 불편한 공간으로 형상화된다. 보수적인 세력과 신진 세력의 암투가 벌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는 앞서가는 신세대로 주목 받고자 애쓰는 젊은 영혼들의 안타까운 몸짓이 있다. 욕망을 비우거나 채우는 방식으로 허전함을 달래는 사람들의 아픔이 있다. 컴퓨터와 욕망 그리고 인간. 그들의 관계의 초입에 이 소설집이 자리하고 있다. 책이 발간된지 약 10년이 지난만큼 이제 작가는 지난 신세대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