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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춤이다
김선우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우리의 눈은 거울 없이는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한다. 그녀의 말대로 눈이 혁명이라면, 우리의 비극은 도구 없이는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p.30
"그런데 말이지요,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는 아무 것도 구원할 수 없어요."
p.34
그런데 말야. 불안해. 의지란 육체 앞에서 얼마나 헛된 것인지 세숫대야에 얼굴을 담가보면 알아. 인간에게 한계상황은 멀리 있지 않아. 나는 내 의지가 불안할 때마다 세숫대야에 찬물을 받곤 했어. 물속에서 이를 악물었어.
몰락해간 사람들은 하소연할 데가 없어. 자기 자신은 스스로 지켜낼 수밖에 없어. 어떤 경우에도 나는 내가 지킬 거야. 절대로 패배하지 않을거야. 절대로 패배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말이지. 세숫대야 가득 찬물을 채우고 얼굴을 깊이 담글 때마다, 나는 어쩌면 두려워 울었나봐. 물속에서 울면 자기 울음의 정체를 알 수 없어지니까. 눈물과 눈물 아닌 것이 혼합되어 불결해지니까.
p.58
어떤 억압도 영구적일 수는 없다. 춤을 추면서 여자는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살아 있고, 살아 있는 한 꿈꾸고, 욕망하고, 움직이고, 흔들리며 달릴 것이다. 여자는 자신의 미래를 미리 축하하고 싶었다.
p.216
김선우, <나는 춤이다> 中
+) 그녀가 발표한 가장 최근의 시집에서 그녀는 말했다. 당분간 시를 쓰지 않겠다고.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절필의 의미일까 조마조마했었다. 여성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최대한 증폭시킬 줄 아는 시인을 잃어버릴까봐 걱정도 좀 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소설을 썼다.
이 작품을 간단히 말하자면 무용가 최승희의 삶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게 많다.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의 끈질긴 장인정신과 때로는 시대적 상황에 굴복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조선의 무용가의 모습, 남성만이 존중받던 봉건의식이 팽배한 사회에서 여성으로서의 파격적인 지위를 지켜내는 강한 여자의 모습, 모방과 창조 사이에서의 예술가의 고민과 선택 등등이 있다.
김선우라는 작가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여성을 얼마나 고귀하고 순결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는지. 여성작가라서 그렇다는 판에 박힌 편들어주기식 표현은 사양하고 싶다. 그저 그녀의 가치관 혹은 세계관에, 존중받아야 할 여성의 능력을 증폭시키는 힘이 잠재되어 있다고 믿고 싶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최승희는 그닥 흥미로운 소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건의 8할은 허구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작가는 말했지만, 역사 속의 인물을 소설로 재미있게 살려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에 지루하지 않을까 의심했다.
하지만 역시나 김선우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소설은 꽤 재미있었는데 고리타분한 역사서의 사실들을 나열해 놓은 소설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사실인지 판가름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읽히는대로 고분고분 받아들이면 된다. 단숨에 책을 읽었는데 읽는 내내 극중 최승희의 도도한 자의식과, 누구 앞에서라도 최고의 무용가가 될꺼라는 당당한 목소리가 매우 부러웠다. 지독한 연습벌레와 어떤 것으로도 부러뜨릴 수 없는 의지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이렇게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에 옮기는 최승희의 태도를 통해 예술을 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소설가로서의 첫 출발을 시도한 김선우에게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