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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알랭 드 보통 지음, 이강룡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이름을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죠?"
"제가 그렇거든요. 아주 오랫동안 그래왔죠. 신문기사에 난 사람 이름 같은 건 기억을 못해요.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문제로 걱정하느라고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는 것이 힘들게 마련이죠."
p.52
그리고 그녀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알게 됐다. 타인에 대한 명료한 첫인상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결국 무지함이 아닌 앎의 축적이라는 것을. 우리의 선험적 도식들을 지워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의 길이다. 우리가 인정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가 25년간 알고 지냈던 남자 혹은 여자를 하나의 정연한 총체로 응집시킬 수는 없다는 점이고, 다른 이들도 우리처럼 복잡하고 알기 힘든 존재라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와의 짧은 첫 만남 뒤에는 충분히 생각할 여유와 인내를 갖지 못하는 - 좀더 관대해지지 못하는 -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pp.57~58
그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수록 알고자 하는 의지는 줄어든다는 역설을. 함께 이야기할 시간을, 사과를 다 먹어치울 만한 시간에서 수도꼭지가 다 말라버릴 만한 시간까지로 무한정 확장한다고 해서 훌륭한 대화 주체를 향해 나아간다는 보장은 없을 것 같다. 서로에 관한 궁금증이 더 이상 급격하게 솟아나지 않는 것은 삶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앎이란 그것을 어느 정도 소유했는지를 암시한다. 타인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요구를 외면한다. 키르케고르의 아이러니 이론에 대한 그들의 관점처럼 쉽게 다루기 어려운 어떤 것들은 모두 외면당한다.
더욱이 누군가를 더 오래 알수록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들에 관한 자책감도 늘어난다. 주어진 시간 내에 그들의 강아지나 아이, 아버지 이름이나 직업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제 맥락 안에서는 그들에게 이질성을 드러내 보이는 장치가 돼버린다.
p.327
알랭 드 보통,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中
+) 전철에서 책을 꺼내 읽고 있을 때 앞에 앉은 여자 둘이 키득거리며 웃어댔다. 처음에는 왜 그런가 싶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책의 제목만 읽고 상상했나보다.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한 것일까.
이 소설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의 중요성과 한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의 관점 형성을 잘 그려내고 있다. 원제는 'Kiss & Tell'인데, 역자에 따르면 이것은 유명한 인물과 맺었던 밀월 관계를 언론 인터뷰나 출판을 통해 대중에게 폭로하는 행위를 뜻한다. 물론 이 소설은 그런 의미없는 폭로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화자는 '이사벨'을 만나서 그녀를 알아가는 과정을 차분하게 묘사한다. 철학자의 말을 빌려오거나 자신의 경험을 들춰내거나 해서, 마치 한 사람의 전기를 쓰는 입장에서 글을 써내려간다. 전반부 보다 후반부로 갈수록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비교적 관찰하는 관점이 현실적이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시간'이란 틀에 기대어 얼마나 오만할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함께'라는 단어까지 곁들여 한 사람을 안다고 자부하는 자세는 꽤 거만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사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안다'는 표현이 타자와의 거리를 좁힐 수는 있겠으나, 같은 길 위에 서 있다해도 내가 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은 읽을수록 매력적이다. 마치 한 편의 철학서 같기도 하면서 영화같기도 하다. 현란한 이미지 구사는 없지만 깊이 있고 담백한 필치는 압권이다. 나는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 어떤 한 순간이 아니라 꽤 오랜 시간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안다'라는 말로 인해 타자와의 거리를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줘야 하는지도 배웠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어떤 '앎'도 핑계일 뿐이며, 게으를수록 멀어진다는 것.
첫인상을 지워가는 것은 변하는 상대방이 아니라 나의 기억일 뿐이라는 것.
'기억' 혹은 '앎'은 결국 주체가 선택하고 싶은 순간만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