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문학동네 시집 80
이병률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좋은 사람들'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비좁다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적다 하지만 햇빛은 좁은 골목에서 가루가 될 줄 안다 궂은 날이 걷히면 은종이 위에다 빨래를 펴 널고 햇빛이 들이비치는 마당에 나가 반듯하게 누워도 좋으리라 담장 밖으론 밤낮없는 시선들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바쁘고 나는 개미들의 행렬을 따라 내 몇 평의 땅에 골짜기가 생기도록 뒤척인다 남의 이사에 관심을 가진 건 폐허를 돌보는 일처럼 고마운 희망일까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메게 아름답다 적과 내가 한데 엉기어 층계가 되고 창문을 마주 낼 수 없듯이 좋은 사람을 만나 한 시절을 바라보는 일이란 따뜻한 숲에 갇혀 황홀하게 눈발을 지켜보는 일 (지금은 적잖이 열망을 식히면서 살 줄도 알지만 예전의 나는 사람들 안에 갇혀 지내기를 희망했다) 먼 훗날, 기억한다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낸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 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이라고 내가 물이고 싶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노을이 향기로운 기척을 데려오고 있다 날마다 세상 위로 땅이 내려앉듯 녹말기 짙은 바람이 불 것이다

 

 

이병률,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中

 

 

+) 마흔 살의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첫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에서는 편안하고 안타까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유지되고 있다. 마치 예순을 앞둔 할아버지의 목소리로 시 한편 한편이 울린다. 시인은 주변의 안타까운 것들에 시선을 주고, 마음을 준다.

 

그 마음은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은 오지 않고 내심 앓는 소리로 끓고 있는 냄비에만 마음이"[아물지 못하는 저녁] 쓰이는 것과 같다. 자신도 모르게 "연필 부러지는 소리보다 작게 세상을 툭 치고 지나가는 것"[공기]들에 고개를 돌리기도 하는 사람이 화자다.

 

삶은 시인과 동떨어지지 않은 채 진행되고 있고, 당연히 과거와 현재의 길을 떠오르게 한다. 거기서 "바람"은 매서움이자, 다그침이자, 신선함이자, 목표를 향한 지표이다. 그것으로 인해 목표를 설정하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목표로 나아가기도 하는 존재다. 바람이 갖고 있는 시간적 의미와 세상과의 관련성 등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간다.

 

마치 시집을 몇 권이나 냈던 사람처럼 편안한 목소리가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무난하게 안주하려는 자세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병률이 노래하는 바람의 삶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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