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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1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평점 :
길이란 여행을 위하여 하느님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행운이 있을 이유가 없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하느님이 길을 땅바닥에 납작하게 만든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느님이 무엇인가를 계속 움직일 목적으로 만든다면 그것은 길이나, 말, 혹은 마차처럼 앞뒤로 길게 뻗어야 한다. 그런데, 한자리에 머물도록 만든 것이라면, 나무나 사람처럼 위아래로 뻗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위 아래로 쭉 뻗은 사람이 길에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길과 집 중에서 어떤 것이 먼저 만들어졌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집이 먼저 세워져 있는데 그 옆에 길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절대로. 마차를 타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마다 현관에 침을 뱉는다면 집 안에 사는 사람들이 마음 높고 편히 살 수 있겠는가? 사람이란 나무나 옥수수처럼 한곳에 머무르도록 만들어졌다. 만약 사람이 계속 움직여야 하고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면 하느님은 사람을 뱀처럼 길바닥에 쭉 뻗어 기어다니는 모양으로 만들었어야 한다. 분명히 그렇다.
p.45
낯선 방에서 잠을 청하려면 네 자신을 모두 비워야 한다. 잠을 자기 위해 자신을 비우기 전엔 넌 네 자신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자신을 비우면 그때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 완전히 잠들어 버리면 넌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내가 존재하는지 안 하는 지도 모른다. 주얼은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스스로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얼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또한 그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잠을 자기 위해 자신을 비울 수 없다.
p.95
말하려고 하는 내용과 내뱉어진 말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캐시가 태어났을 때, 모성이란 말은, 그 단어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아이를 가진 엄마는 그런 단어가 있든 없든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공포라는 말도 공포를 단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다. 자존심이란 말도 마찬가지로 자존심이 없는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고.
p.198
가끔씩 난 확신할 수가 없다. 누가 미치고 누가 정상인지 알게 뭐란 말인가. 어느 누구도 완전히 미치거나, 완전히 정상일 수는 없을 거다. 마음의 균형이 제대로 잡히는 것이 쉽진 않으니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p.268
윌리엄 포크너,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中
+)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을 읽다가 외국 작가들은 이런 소설 기법을 추구하는가 생각한 적이 있다. 이번에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인물마다 각자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 즉 다양한 관점을 사용한 서술 구조가 그것이다. 하나의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 인물의 이야기 모두를 들어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소설에서 사건은 화자가 누구냐에 따라 재구성되고 있으며, 그것을 독자가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상황으로 그려질 수 있다. 하나의 시점이나 관점으로 소설을 전개하는 것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혼란스러웠으나,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오히려 인물의 내면심리를 더욱 세세하게 보게 되어서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크너의 문장은 단순한 일상 용어의 나열이지만 의외로 난해한 구절이 많다. 시의 한 구절처럼 함축적인 표현들과 비유적 기법들 때문에 그렇겠지만,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천천히 이해해야 하는 독자에게 인내심을 요구하게 만든다. 오히려 이 소설은 읽으면서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데 나는 존재론적 의식을 지닌 작가의 문장들이 무엇보다 눈에 들어왔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나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고 해야 할까. 우울한 빛깔의 소설이나 그러한 인물들의 모습이 어쩌면 인간의 일상이 아닐까. 어쨌든 이 소설을 통해 다양한 관점을 사용한 서술 기법에 대해 낯설지만 신선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