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세상이 그런 젊은이를 좋아하니까. 세상은 질문하는 젊은이를 좋아하지 않아. 자기 대답을 갖고 있는 젊은이를 원하지."
p.47
 
"기회는 신선한 음식 같은 거야. 냉장고에 넣어두면 맛이 떨어져. 젊은이에게 제일 나쁜 건 아예 판단을 내리지 않는 거야. 차라리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게 더 나아. 잘못된 판단을 내릴까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 이게 제일 나빠."
p.54
 
군대에서는 아무도 "이일병, 너라면 이 두 가지 일 중에서 뭘 할래? 골라봐" 같은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냥 정해진 일을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회로 돌아오자 세상은 선택할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딜 좀 가려고 해도 먼저 버스냐 지하철이냐를 결정해야 했다. 베스킨라빈스든 스타벅스든 계산대 앞에서는 늘 뭔가를 골라야 한다. 부라보콘이냐 월드콘이냐만 결정하면 됐던 시절은 가버린 것이다. 마술사들은 앞에 있는 관객에게 카드를 고르게 함으로써 속임수를 감춘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결과에 대해서는 쉽게 믿어버리고 심지어 책임까지 지려고 하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인간은 늘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속는 것이다.
p.67
 
나는 점주의 말투보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 더 충격을 받았다. 만약 당신이 한 인간을 서서히 파멸시키고 싶다면 그런 눈빛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상대가 자기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눈빛이며, 앞으로 그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절대로 믿지 않는 눈빛이며, 혹시 그런 존재가 되더라도 적어도 자신만큼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하는 눈빛이다.
p.109
 
"분노는 아주 신성한 거야. 빈정대거나 비아냥거리는, 그런 게 아니야. 자기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힘, 폭력 같은 것에 맞서 싸우려는 숭고한 정신이란 말이야."
p.219
 
김영하, <퀴즈쇼> 中
 
 
+) 나는 이 작품이 김영하의 첫 작품집이 아닐까 의심했다. 처음 몇 쪽을 읽고 나서 작품년도를 확인하려다가 말았는데, 다 읽고 난 뒤 확인한 창작년도를 보고 기겁했다. 2007년도에 만든 작품이었다. 이게 정말 내가 아는 소설가 김영하의 작품이 맞는가, 찾아보고 또 찾아보았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그의 소설 분위기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즐기던 작가에서, 현실 속의 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가로 전이된 것인가.
 
물론 완벽히 현실에 들어선 것은 아니다. <퀴즈쇼>에 등장하는 민수의 '회사'부터, 민수가 만난 '퀴즈쇼'의 인물들까지.. 가상현실의 냄새가 물씬 풍기기 떄문이다. 그러나 기존의 작품은 그 환상과 가상 현실에 비중을 두었다면, 이 소설은 현실에 한 걸음 더 가까워보인다. 민수가 끝없이 고민하는 것은 젊은이로서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법인데, 그 중심에 인간 내면의 문제가 얽혀 전개된다.
 
나는 인물들이 한 두마디 내뱉는 대사들에 흥미를 느꼈는데, 작가의 문화섭취량이 엄청나다는 생각과 함께 인간에 대한 혹은 삶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했던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기존 김영하라는 소설가에 대한 나의 판단을 환상에서 현실로 옮겨오는 역할을 했다고 해야할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장편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보가 분명치 않아서 초보작의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최여사'가 왜 빚을 졌으며, '빛나'가 '민수'에게 집착하는 이유로 단지 "불쌍해서"라는 것은 너무 연계성이 없다. 최여사에게 돈을 빌린 노인의 등장조차 이 소설에서 적절한 역할과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뭐라고 해야할까. 인물들이 허공에 붕 떠 있는 기분이랄까.
 
김영하의 다른 소설들을 좀 더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호출>을 읽었을 때의 파격적인 기분은 순간이었던 것일까. 어쨌든 모처럼 좋은 대사가 많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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