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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의 다양한 일들 중 드물게 일어나는 일 하나가 절정에 다다른, 아주 좋은 시기였다. 결국 그게 환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절정의 순간에 이르러 이제까지 걸어온 길이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절정이란 전환점의 다른 말이다.
pp.21~22
"문제는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라는 것이죠. 보는 바에 따라서 그것은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이상 문학을 두고 최재서와 김문집이 각각 다르게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상과 관련해서는 열정이라는 논리를 뛰어넘어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란 말입니다. 진짜라서 믿는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진짜인 것이고 믿기 때문에 가짜인 거죠."
p.83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전기적 사실을 끌어모은다고 해도 이상의 이 문장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상이 결코 가난하고 허전해지지 않는 한, 모든 전기는 이상이 쳐놓은 비물의 그물에 걸려들 뿐이다.
p.121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난 사람은 끝끝내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울어야만 한다. 그 가운데에 약간의 변화쯤 있다 하더라도 속지 말라. 그것은 다만 그 '불행한 운명'의 굴곡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불행한 운명'과 맞서기 위해 김해경은 어떻게 했는가? '네가 세상에 그 어떠한 것을 알고자 할 때는 우선 네가 먼저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아라. 그런 다음에 너는 그 첫번 해답의 대칭점을 구한다면 그것은 최후의 그것의 정확한 해답일 것이다."' 김해경이 자신의 의지로 찾은, 이 '불행한 운명'의 대칭점이 바로 이상이었다.
p.128.
운명은 마지막 순간에 모든 논리체계를 무너뜨리고 이제까지 지나온 그 모든 광경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말했거니와 내가 지금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논리적으로 내 삶은 사소하게 바뀌어버렸다. 내가 처한 이 어두움의 상태는 그 사소함의 논리적 귀결점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마저 내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저 연표를 읽어내려가듯 직선을 따라가는 마지막 지점일 뿐이다. 내게는 전혀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p.132
김연수, <꾿빠이, 이상> 中
+) 처음 문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시인 '이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를 비롯하여 소위 '모더니즘 문학'이라는 분야가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시기였다. 그러나 묘하게도 나는 1930년대 모더니즘에 대한 관심을 1950년대 후반 모더니즘 문학으로 옮겼다가, 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빠져 헤매게 되었고 결국 아무 것도 건지지 못했다. 그 거대함에 내가 쓰고자 했던 논문의 방향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진행되었고, 나는 아예 모더니즘이란 글자를 나의 삶에서 제외시켰다. 그것을 접하기에 나는 너무 겁이 많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몇 년 전이 생각난다. 왜 그때 그렇게 겁을 냈을까. 이상, 나는 '이상'의 시를 읽을 때마다 묘한 동질감에 부르르 떨었으며, 그의 시를 통해 알 수 없는 의미들을 만들어내길 좋아해다. 그것이 그 시인의 매력이며 개성이라고 생각했었다. 소설가 김연수는 내게서 '이상'을 살려냈다. 시인의 연구자료와 전기에 대한 설명이 좀 지루하기도 했으나(어쩐지 소설이라고 읽기에는 너무 학문적 접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를 통해 허구인지 또는 '그럴 수도 있는 사실'인지 헛갈리는 서사가 돋보였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이상이 김해경인지, 김해경이 이상인지 아이러니하다. 결국 그 사람이 그 사람이나, 이 소설을 통해 김해경은 자신의 삶을 시인 '이상'으로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김연수는 독자들에게 시인의 삶과 평범한 한 사람의 삶을 구분하며 김해경이라는 사람이 선택한 이상의 삶을 숭고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나는 2000년에 쓰여진 김연수의 <스무 살>이란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에 비해 이 작품이 약 1년 뒤에 쓰여진 소설치고는 작가가 꽤 성장했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소설 한 편을 쓰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노력해야 하는가 다시 한번 깨닫는다.
한 사람의 삶이 하나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무엇보다 김해경은, 그러니까 이상은, 그것을 몸소 보여준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