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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 - 제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해경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도 무관심도 아닌 배신이란 걸 알았을 때, 그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사랑이 깊으면 오해가 쌓이고, 믿음이 크면 의심도 자라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믿음은 오해의 결과이고, 사랑은 오직 의심을 낳을 뿐인가. 사랑의 뿌리는 믿음이므로, 믿음이 사라지면 사랑도 끝난다. 배신은 언제나 당하는 자의 것. 배신한 자는 예로부터 한 번도 배신한 적이 없다. 믿었던 적이 없으므로.
p.16
사실은,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것들은, 그 사실이 발생한 뒤 단 일 초라도 시간이 지나야 인식의 대상으로 모양을 갖춘다. 요컨대 모든 사실은 과거에 속하는 것. 그러므로 확고부동한 사실이란, 알고 보면 정확한 기억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정확한 기억....... 완전하고도 유일한 사실의 복원.......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혹은 자신의 행복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p.54
그녀는 오늘도 우연히 그와 마주치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헛된 바람이다. 우연은 언제나 기대 밖에서 찾아오는 기회이므로, 사람들은 흔히 우연한 기회에 어찌했다고 말하지만, 우연치 않은 기회란 존재하지 않는 법. 기회를 얻고 싶은 사람은 기대하지 말 일이다.
p.154
막을 수 없는 후회를 비키는 방법은 정반대의 과거를 상상해보는 공허한 놀이뿐이었다. 그가 미래에 대해 막막해하는 습관은 아마도 그 공상의 습관과 더불어 길러진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상상력이란 상상력은 과거를 향해 다 써 버려서 미래를 향해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게 되는 딱한 사정을 이해해줘야 하는 것이다.
p.198
이해경, <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 中
+)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실직한 뒤 아내의 오해(그가 소설다운 소설을 썼다는 오해. 사실은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이었는데.)가 발단이 되어 그는 소설을 써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는 처음에 소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것저것 책을 읽었으나, 그 어디서도 소설이 무엇인지 정의 내린 곳은 없었다. 그가 소설에 대해 깨달은 것은 없고 그래서 그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한다.
이 작품은 소설로 인해 위기에 처한 남자가 소설이 무엇인지, 소설을 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가는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했는데 인물에 따라 소설을 대하는 문학관이 다른 점을 드러낸다. 문학동네 장편소설 수상작인 이 작품은 생각보다 길이가 꽤 길다. 그리고 작가가 정한 구조의 일부일지 모르겠으나 주인공을 둘러싼 우연이 반복되는 느낌이다.
작가의 말대로 '우연은 기대 밖에서 오는 기회'일지니 그것을 잡느냐 잡지 못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 그러나 소설에서 남자는 자신의 소설을 위해 특별히 그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을 쓰는 여자와 아내 사이에서 매개체 역할을 할 뿐인데, 그것은 수동적인 자세일 뿐이다.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일인 것이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주인공이 글쓰기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외부적 요인에 의한 일이지 주체의 문제는 아니다.
내용이 길어서 그런지 쉽게 압축되지 않는 점도 보이지만, 소설을 쓰는 것에 관해서 여러 인물들이 각기 다양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심각하지 않은 어투로 소설쓰기를 대하고 있다. 그것을 감히 뚜렷한 주제의식이라고 불러도 될까. 어수선한 면이 없지는 않으나 자신이 제시하고자 한 바에 대해서 소설 속 상황과 인물의 행동 반경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