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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세상에는 섣불리 맞닥뜨려서는 안 된다고 알려진 크고 작은 금기들이 존재하는데 그중에는 요리사의 손톱, 작가의 맨얼굴, 옛사랑의 현재 모습 같은 것들도 있다. 물론 그것은 주방장의 청결 의식이나 작가의 인간성, 옛사랑의 속물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연희는 그것이 환상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토록 맛깔스러운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의 손길에 대해, 그토록 재미있고 지당하신 말씀을 늘어놓는 작가의 인격에 대해, 그 대상의 실체나 본질과 무관하게 우리가 일방적으로 품고 있는 환상을 경계하라는 이야기라고 짐작했다.
p.9
자신이 전쟁이나 궁핍과 아무 관계 없고, 현실적으로 결핍된 것이 전혀 없다고 느끼는 때에도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환상이 작동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환상인 줄 번연히 아는 동안에도 환상은 활동하고 있었고, 그 대상과 무관하게 환상은 번성했다. 연희가 두려운 것도 그것이었다. 환상의 시원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곳, 인간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pp.29~30
나는 자기 향상을 위해 걷다가 여기 막다른 곳까지 와 있지만, 사실 자기 향상이란 어려운 거다. 정신적으로 깊어지는, 그거는 측정할 길이 없는 거다. 그걸 어디다 꺼내놓을 수도 없고, 물처럼 부어놓을 수도 없고, 바람처럼 어디 부딪쳐서 소리를 낼 수도 없고, 자기 향상은 자기만 아는 상대적인 거다.
p.323
연희가 생각하기에 환상을 대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그것에 끌려가거나 일방적으로 그것을 쫓아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내면에 어리석은 환상 따위는 키우지 않는다고 큰소리쳐서도 안 되며, 재수 없는 환상이라는 놈을 기어이 때려잡아 박멸하고야 말겠다고 기염을 토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조심할 일은 환상을 현실 속에서 성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환상은 손에 넣는 순간 즉시, 필히 환멸로 바뀌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p.392
김형경, <성에> 中
+) 김형경의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고서 가슴깊이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작가도 그런 경험이 있을까. 혹시 작중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바탕에 작가의 자의식적 글쓰기가 깔린 것은 아닐까. <성에>는 도서관에서 무심코 집어든 소설이었다. 오랜만에 김형경의 소설을 읽어야겠다 싶어 말그대로 그냥 집어든 소설이었는데, 새삼스럽게 프로이트가 떠오른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은 모두 프로이트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과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의 논문을 제목으로 삼고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야기를 소설에 끌어들이는 작가의 방식은 꽤 지적으로 보인다. 작가만의 기법이겠지만 어려운 철학 용어들을 기를 쓰고 해석해놓은 분석서들보다 이런 소설 한 두권이 훨씬 더 많은 지식을 전달한다. 감동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성에>를 읽으면서 인물들의 파격적인 설정이 놀라웠는데, 책을 다 읽는 순간까지 '설마'를 외치며 놓지를 못했다. 이 작품은 액자형 소설로 크게 연희와 세중의 사랑(환상적인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속에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치명적인 사랑이 존재한다.
게다가 인물 중심의 소설 시점에서 벗어나 자연물의 시점을 끌어들인다. 참나무, 박새, 청설모, 바람 등 그 모든 존재들이 두 남자와 한 여자를 관찰하며 자신들의 세계와 비교한다. 이는 인간 이외의 객관적인 관찰자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섬세한 설정이다. 인간 내면 심리와 인간 사이의 주고 받는 행위를 거리를 둔 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주관적인 시선을 배제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얼키고 설킨 사랑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난다. 물론 연희와 세중이 오랜 시간 뒤에 다시 만나게 되는 것에서 소설은 시작되나, 그것은 환상 속의 사랑을 강조하는 극적 구조로 보인다. 작가는 죽음으로 설명되는 유토피아를 환상으로 지시한다. 현실에 환상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환상을 현실화시키려는 의도는 삶을 파멸로 이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영화 <거짓말>이 떠올랐다.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가 스치기도 했다. 같을 수도 없고 같지도 않지만 그 작품들이 떠오른건 평범하지 않은 소설의 내용과 구체적인 묘사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작가 김형경이 아닌 새로운 면모를 발견해서 일 수도 있다.
이 소설에서 주목하는 것들, 그러니까 삶에 있어서의 환상, 죽음, 사랑이란 키워드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느 지점에서 중첩시키느냐에 따라 지향점이 달라지리라 본다.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바로 그 지향점의 끝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