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줏빛 소파
조경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당신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제가 거북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거북이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 또한 말입니다. 그래요. 어느새 저는 또 오래 전 내가 사랑했던 그녀를 떠올리고 말았습니다.
-[나의 자줏빛 소파]
 
 혼자가 된 이후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집중할 때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건 내 자아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겪었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은 다른 의사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 보였다. 그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할 적마다 내 눈앞에는 팽팽한 빨랫줄에 걸린 누더기 옷들이 적나라하게 보였고 마른 땅에 침을 뱉어놓은 것처럼 그저 한동안만 자국이 남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것은 일종의 질병이었다. 질병은 내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참고 견뎌야만 하는 것이었다.
-[망원경]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충분히 길들여졌다는 일종의 오만이 생겨날 때 별것 아닌 것으로 시작된 연인들의 싸움은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오해이며 착각이었는가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되는 법이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서로 너무 깊은 착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그런 사소한 이유로 말이다.
-[식물들]
 
이것 봐, 하다못해 새끼손톱만한 한 알의 진주를 얻기 위해서도 적어도 5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내 심장 속에서는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품고 있지 않다. 스스로를 이해하도록 내버려둬. 이해하도록 그렇게 추궁하지 말란 말이다 .
-[아주 뜨거운 차 한 잔]
 
조경란 소설집, <나의 자줏빛 소파> 中
 
 
+) 개인적으로 하성란이란 소설가를 좋아한다. 그것은 깔끔한 문체와 참신한 소재 때문인데, 조경란의 소설을 읽으면서 왜 자꾸 하성란이 떠올랐을까. 조경란의 소설에는 복잡한 스토리가 있지 않다. 간단한 스토리로 인간 관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단순 구성으로 단편 소설을 끌고가는 힘이 제법이다.
 
무엇보다 단정한 짧은 문장이 매우 매력적이다. 그러한 문장들이 모여 문단을 이루고 글을 만드는데 이 소설가의 소설 전개에 어색함이 없다. 꾸밈 없는 말들로 이루어진 문장인데 세밀한 묘사를 표현한다. 상상이 아니라 사실에 가까운 표현들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작가는 소설에서 자신과의 소통, 타인과의 소통 문제를 다룬다. 아니, 오히려 고립된 채 혼자만의 시간을 지켜보는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안의 문제일 수 있고, 타인과의 관계의 문제일 수 있다. 자, 이쯤에서 생각해보자. 교감 혹은 공감이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가. 당위적이나 당위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소설의 전개가 탁월하다.
 
하성란의 소설을 쉽게 읽었다면(이건 어디까지나 과감한 표현이다. 하성란의 소설이 무조건 가볍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조경란의 소설은 뜸을 들이며 읽어줘야 한다. 짧은 문장들의 이어짐이 작가가 표현하는 수화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천천히 수용해야 한다. 현학적인 단어는 없지만 문장 하나 하나에 단단한 힘이 서려 있다. 나도 이런 차분함과 끈기를 배우고 싶다. 문장에서 그런 것을 드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처럼 마음에 드는 소설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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