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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젊은 소설
김미월 외 지음 / 문학나무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언어란 정말 몹쓸 것이며, 악덕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말이란 한 번 뱉고 나면 농구공처럼 퉁겨져 다시 이쪽으로 날아온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피하면 피하는 대로 날아오는 것이 말의 속성이다. 그는 자신이 감지하지 못한 언어의 비밀을 농구선수라는 단어를 통해 깨우친 것이다. 물론 어린 나이에 언어의 심각성에 대한 고민을 깊이 있게 해보지 못했다. 당시로서는 농구에 대한 과도한 과민반응에 시달렸을 뿐이다. 그날 이후 한동안 농구공을 껴안고 자야만 했다.
- 김태용, [중력은 고마워]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이해받으려 하면 안 된다. 어차피 이해가 안 된다. 돈도 안 되는 음악을 만들고 있는 내 상황도 이해가 안 된다. 그런 걸 왜 하고 있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돈 되는 음악도 많은데. 돈 되는 음악을 하는 건 쉬운 줄 알아? 라고 말들 하지만 돈 안 되는 음악을 하려면 얼마나 미쳐야 되는지를 안다면 꼼짝도 못 할 것이다. 바보들이 모르는 건 본질이다. 음악의 본질은 진짜 노래하는 것이고, 의약의 본질은 인류의 고통과 진짜 싸우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 박상, [치통, 락소년, 꽃나무]
내가 세상에 태어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정상의 속도, 그리고 정상보다 빠른 속도. 정상보다 느린 속도로 살고 있는 사람을 나는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느린 것은 빠른 것보다는 덜 두려운 일일 것이었다. 어느 한쪽만이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빠르게 달려나간다는 사실에 나는 진저리가 쳐지곤 했다.
- 염승숙, [춤추는 핀업걸]
셋이라는 건, 결국 모두가 혼자라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수 같아. 밤중에 혼자 깨어, 혼자여서 느끼는 외로움은 어린애의 외로움 같은 거야. 둘이 있어도 외롭다면 그건 처참하지만, 완전한 외로움은 아니지. 둘은 어쨌든 가끔이나마 함께 잠들 수 있으니까. 셋이 되어 나머지 둘이 이미 잠들어 있는 걸 보면서 정말로, 정말로 혼자라는 걸 깨달아야 사람은 완전해져.
- 윤이형, [셋을 위한 왈츠]
김미월 외, <2007 젊은 소설> 中
+) 젊은 소설은 '문학평론가가 뽑은 신춘문예, 전통문예지 당선 소설가(3년차) 문제소설'로 엮어져 매년 발행된다. 말그대로 최근 젊은 소설가는 어떤 식으로 글을 쓰는지 살펴보고 싶어서 읽어보았다. 이 책에는 평론가 김종욱, 최성실, 이수형의 선정으로 총 10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있다. 작가는 대부분 2004년~2006년 사이 데뷔한 사람들이다. 내 기대에 부응할 작품이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선택했는데,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꽤 많다.
이들의 작품을 읽으며 신인 답지 않게 자연스럽게 써내려간 필치가 내 의심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김미월의 [유통기한]은 정신대 할머니들의 문제를 그들과 생활하며 천천히 받아들이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유통기한을 지우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인공에게 시간이라는 문제, 그러니까 삶에서 유통될 수 있는 기한이 중요한 의미가 된다. 정신대 할머니의 삶을 유통기한을 지우듯 삭제하고 다시 쓸 수 있다면 어떨까. 아니 우리의 삶에 새긴 유통기한을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면 어떨까.
김이설의 [환상통]은 암을 겪은 딸이 자신처럼 암을 겪는 엄마를 돌보면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자궁 적출로 아이를 낫지 못하자 이혼을 선언하고 그 순간 자궁이 사라진 곳에 환상통을 느끼게 된다. 암에 걸린 엄마가 결국 죽고 그 부재의 공간에 또 한번 환상통은 찾아온다. 부재의 아픔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태용의 [중력은 고마워]를 읽을 때는 마치 박민규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는데, 말이 갖고 있는 속성을 농구공에 겹침으로써 펼치는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다만 언어(말)의 속성이 농구공에 묻혀 가려지는 부분이 살짝 아쉬웠다.
박상의 [치통, 락소년, 꽃나무]는 이상의 '꽃나무'와 락음악, 치통을 중심으로 쓰여졌는데 꽤 포스트모던한 분위기를 풍긴다. 어느 부분이 사실인지 진심인지 혹은 상상인지 묘사인지 알 수 없도록 섞고 또 섞었다. 이처럼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를 오고가는 작품으로 염승숙의 [춤추는 핀업걸]과, 황정은의 [문]이 있다. 황정은의 작품은 죽은 자와의 교감을 환상적으로 그려내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살아 있을 때의 현실과 연결된다. 죽은 뒤의 세계가 중점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실에 초점을 맞춰 대화가 전개된다.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신인 작가들의 소설을 얕잡아 보는 엄청난 실수를 했을까. 고작 한 두번 글을 쓰고 당선한 사람은 없을텐데, 그처럼 어설픈 작품이 보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무엇보다 그들의 탄탄한 글쓰기가 든든했다. 이들이 앞으로 문단의 흐름에 따르지 않는 자기만의 뚝심으로 글을 써간다면 좋은 작품이 많이 탄생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