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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으로 봅니다
헨리 그룬왈드 지음, 공경희 옮김 / 사과나무 / 2000년 9월
평점 :
시간은 많지 않았고, 마땅히 읽을 책이 없어서 우연히 고르게 된 책이다. 그런데 평소의 책 읽는 속도로 보아 두 시간이 안 돼 다 읽을 것 같았던 이 책은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진지한 이야기가 가볍게 쓰여진 책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타임>지의 편집장이며 오스트리아 주재 미국 대사였다는 헨리 그룬왈드라는 저자의 이름이 내게는 생소했다. 타임지의 편집장이라...누가 봐도 글을 읽고 쓰는데 의미를 두는 사람이라는걸 알 수가 있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자식들까지도 하다못해 약병의 용법까지도 세세하게 읽는다는 대목에서, 잠깐이라도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읽을 것이 없으면 당황해하는 나와 얼마나 똑같은지 웃음이 나왔다. 책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읽는 것에 의미를 저자이기에 내게 더 다가왔다. 그런 그가 황반변성증이라는 병을 앓게 된다. 황반변성증으로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시기의 기록이다. 책을 못 읽는다니...나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럼에도 책의 서두에는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몇 점씩 실려 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화가도 아닌 사람의 책에, 더구나 시력을 잃어가는 사람의 책에 그림이 있다니...시력을 상실해가면서 그는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 지금껏 봐왔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보는 길을 택했다.
황반변성증 투병기라든가, 장애 극복의 이야기는 아니다. '황혼'이라는 원제 twilight 에서 느낄 수 있듯이 노년기에 들어서 있는 지적 인간의 담담한 기록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책을 다 읽고서 표지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젊었을 때에는 꽤나 신랄하게 남의 글을 씹었을 것 같은 예리한 인상의 이 노인을...내일 아무 것도 못 보게 된다면 지금껏 봐온 것들을 다시 한 번 보겠다는 이 노인처럼 나도 노년을,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겠다. 편집장이라는 직업을 가졌던 이답게 책을 간결하게 쓰고 있다. 인상깊은 구절을 적어본다.
부족함이란 우리 모두에게 예외없이 적용되는 인생의 법칙임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면 인생 자체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더 어렵고, 더 복잡하지만, 더 큰 보상을 얻게 된다. 없는 것에 매달리지 않고, 남아있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된다. 또 그래야 한다.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이 상하긴 하지만, 아직 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 환희를 느낀다.
인생을 다른 사람의 인생과 견주어 내 것이 낫다, 네 것이 낫다는 식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식이라면 결국 잘난 체하거나 질투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우리는 나름의 견지에서 자기 인생을 판단하고 살아가야 한다.
반만 보는 것이, 인간의 조건으로 보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상징인 듯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