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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ㅣ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잘 쓴다. 말을 다듬고 빚어 빛나게 만드는 재주만큼은 동시대(동세대가 아니다!)의 어느 시인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태어난 말들로 가득한 몇몇 시들은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아름답고 서럽다. 가끔 눈에 띄는 비문만 해도 그렇다. 힘과 당위를 굳건히 말하고자 비문을 사용하던 고은과 달리, 김경주는 자신을 빠져나간 말들이 한국어라는 족쇄 속에서 숨막혀 하고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비문을 내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모든 시는 음악을 동경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 시인은 글자수 맞추기와 행갈이 놀이를 하지 않아도 자신의 말들을 쉬이 리듬에 맡길 줄 안다. 빽빽한 언어의 밀도에도 생각보다 쉽게 읽힌다는 사실이 그 증거인데, 이러한 경지는 단지 말을 잘 부린다고 허락되는 높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차마 별 다섯 개를 주지 못하는 이유는 이 시집 역시 도리없이 첫 시집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선배 시인들의 처녀시집이 불러일으켰던 미적, 정서적 충격에 값할 만한 무엇을 전해주지 못한다는 데 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시적 재능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이 시인도 자의식 과잉이라는 짐을 덜어내지는 못했다. 청승과 현학, 연민과 문청 특유의 감상으로 두툼한 이 시집 전반의 정서 자체는 시인의 연배를 감안할 때 자연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진부함만큼이나 이 시집의 성취를 바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형식적 실험이 군데군데 시도되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을 텐데, 이는 딱히 새로울 것도 없고 '80년대 몇몇 시인들이 가져다준 충격에 견주면 장난처럼 보인다. 어쩌면 비평가들이나 문학사가들은 다소 난처할 수도 있겠다. 최근 논의되는 '미래파' 시인들과는 달리 김경주의 시집에서는 이렇다할 '당대성'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말마따나 '한국시의 축복'일 정도로 섬세하고 짜여진 한국어 시가 김경주를 통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수많은 선배 시인들의 발자국 덕택일 것이므로, 이 시집의 지금 여기에서 자리매김되는 당대적 맥락을 지극히 일반론적으로 말해볼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을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이 이 시집을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 될 것이라고 감히 단언하는 어느 비평가의 말에 동의하는 데 주저하게 만든다. 황지우나 박노해가 김경주보다 시를 잘 쓴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들의 첫 시집이 '중요한 시집'으로 평가되는 것도 그 안에 수록된 시들이 지닌, '80년대가 아니라면 획득할 수 없을 그 당대성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김경주에 대한 평가는 다음 시집이 나올 때까지 미루어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김경주가 시를 쓰면서 자신의 재능을 좀더 집중하면서도 절제할 줄 알게 되면 그의 진면목이 무엇인지, 진정 그가 잘 쓸 수 있는 시란 어떤 시인지 지금보다는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단, 하나만큼은 지금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다. 김경주가 시에 대한 재능과 재주, 모두 철철 넘쳐흐르는 사람임에는 분명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