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소란을 피운 뒤, 마루 끝에 나와 앉은 타박네는 궁상맞게 몸을 옹그리고 지는 해를 멀거니 바라본다. 하루 중 이맘때가 가장 을씨년스럽다. 해가 지고 사위가 어둑어둑하면 부용각의 밤이 시작되는데도 타박네는 꼼짝도 하지 않고 몸을 잔뜩 옹송그리고 있다. 뼛속 깊이 파고드는, 자신의 가슴속에서 불어오는 건지 밖에서 불어오는 건지 진원지를 알 수 없는 그놈의 바람 때문이다. 마음을 딴딴히 여미지 않고 내버려뒀다간 바람의 찬기에 몸마저 까라지기 십상이다. 부용각엔 해질녘에 까라지는 인사가 타박네 말고 또 있다. -34p쪽
"난 성만 믿소. 죽어가는 날 살려낸 기 한두 번이오. 환장할 것 같은 내 맘을 매번 붙들어준 것도 성이고."
자신의 어깨에 기댄 오마담의 등을 가만가만 두드리던 타바네의 입에서 가늘고 긴 한숨이 피리 소리처럼 새어나온다.
오마담, 아니 연분아. 나도 너처럼 무언가에 환장을 해보고 싶다. 환장한 순간만은 구름에 발을 디딘 듯 물살에 몸이 실린 듯 그리 살아지는 게 아니더냐. 잠시라도 그 무게를 잊는 것이 아니겠느냐. 폭폭한 이생을 단 일 초라도 좋으니 내 것이 아닌 양 아무도 모르게 땅바닥에 살짝 부려놓을 수만 있다면.
테두리가 이지러진 달이 부용각의 처마 끝에 걸린 때는 음력 유월 스무이레, 유시. 한지 바른 장지문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뒤란 대숲은 한정없이 깊고 울울하다.-40p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