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흑사관 살인사건 ㅣ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8
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강원주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12월
평점 :
그로테스크하거나 오컬틱한 분위기의 추리 소설을 좋아해서 만족스러웠던 책입니다.
일본 추리 소설 3대 기서 중 한 권으로, 중도 포기자가 속출하는 작품이라고 해요.
이유는 1934년에 첫 발표된 만큼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표현들이 들어있기 때문인데요,
쉽게 번역이 되었다는데도 저 역시 만만하게 읽지는 못했어요.
또 하나. 전문적인 지식이 아니면 알 수 없는 트릭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는 것이 많을수록 이해가 쉬울 테니 더욱 재밌지 않을까 싶기도 했어요.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넣어둔 성관과 닮았다 하여
<흑사관>으로 불리는 후리야기 성관. 그곳에서 40년 동안 감금된 사람들과
미스터리한 살인사건. 그리고 수사 의뢰를 받은 명탐정의 등장.
시작부터 기묘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4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외출한 적이
없던 여인이 온 몸에 빛을 발하며 죽은 것이에요. 기묘한 자세도 의문이지만
평소에 잘 먹던 배는 놔두고 독극물이 들어간 오렌지만 딱! 골라서 먹은 것도 신기했죠.
'노리미즈'탐정은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서 문헌이나 출처를 내세워 편집광적으로
사건을 재구성합니다. 같이 온 검사와 수사국장도 절레절레 할 정도의 방대한 지식은
넘 어려워서 지루하기도 하고;; 알고 있던 내용이 나올 때면 급 반전되어 몰입도가 높아졌어요.ㅋ
흑사관의 주인 '산테쓰 박사가 자살로 삶을 마감한 후 아들과 입양한 외국인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살인 사건'에 유령이나 혼령의 존재도 언급 되지만,
보란 듯이 탐정을 조롱하는 듯한 정체불명의 인물은 더욱 미궁에 빠지게 합니다.
노리미즈 탐정의 가설이나 추측 또는 확신에 찬 추리를 듣다보면 전문적이라
어렵기도 했지만 흥미로운 내용도 많았는데요, 인용하는 사례들이 대부분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는 놀라웠어요.ㅎ
추리 소설이지만 단순한 사건 해결만이 아닌 다양한 지식이 총 출동된 작품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독자에게는 호불호가 되겠지요?ㅎㅎ 복잡하고 피곤해서 완독하기를 갈등했다는
후기도 있다고 하니ㅋ 책 소개에 나왔던 "정복해야 할 책"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네요.
점성술, 종교학, 의학, 물리학, 심리학, 암호학, 약학, 음악까지 ㄷㄷ;;
....이쯤 되면 지식이 모자라 보이던 수사국장이 친근해지기 시작해요ㅋ
'세비야의 재판소에는 십자가와 고문용 형구가 나란히 있습니다. 하지만 신이 만약
지옥에 불을 붙여 영원히 타오르기를 원한다면 먼저 재판소 건물에서 회교식 높은 아치를
내몰아야 합니다. 나는 산토니아에 와서부터 옛날 게티아인이 남긴 어둡고 낡은 장원에
살았는데 실로 이 장원은 특별한 성질을 가졌습니다. 그 장원자체가 이미 인간의 온갖
고뇌를 깊이 생각하는 사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여러 가지 혹형을
결합하고 비교해 마침내 그 방면에서 가장 완벽한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 제5장. 제3의 참극 _307
가장 흥미진진해서 인상 깊었던 사례 중 하나입니다.
흑사관이라는 건물 자체가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하던 차에
사디즘의 사례를 들은 것인데,
16세기 필립 2세 때 스페인 세비야 종교재판소에 포스콜로라는 젊은 사제 재판관이
심문이 둔하고 이단 화형 행렬에도 공포를 느껴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해요.
그런데 그는 고문용 형구가 많았던 곳이 아닌, 오히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잔인한
형벌을 가할 수 있는 형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장원'의 건축양식에
있었다고 설명하는 부분이었는데 섬뜩했어요. 이 부분도 실제로 있었던 것일까요
이런 기묘한 이야기에 푹 빠지다 보면 정작 사건 추리를 놓칠 수 있으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결말도 마음에 들긴 했지만 '장황한 지식'을 나열하던 노리미즈 형사의
민낯(?)도 함께 알게 되면서 기존의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탐정과 다른 부분에 재밌었어요.
시원스럽고 깔끔한 살해 동기 설명까진 아니었지만 납득은 할 수 있었습니다.
한 번 본 지금으로서는 검색해 볼 것도 많고,
자세히 찾아보고 싶은 사례들도 있어서 재독을 결심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말하고 싶어요.
기서라 불리는 만큼 난해한 부분이 많았을 텐데요, 원서를 보고 비교할 수는 없어서
검색해보니 나무 위키에 일부 문장이 있어서 가져와봤습니다.
'――セヴィリアの公刑所には、十字架と拷問の刑具と相併立せり。
されど、神もし地獄の陰火を点し、永遠限りなくそれを輝かさんと欲せんには、
まず公刑所の建物より、回教式の丈高き拱格を逐うにあらん。'
'세비야의 공형소에는 십자가와 고문용 형구가 나란히 있어요.
하지만 신이 만일 지옥의 음화에 불을 댕겨 영원히 그것을 빛내려고 한다면
먼저 공형소의 건물부터 회교식의 키 큰 아치를 몰아내야 하지 않을까요?' - 2005년 타 출판사
'세비야의 재판소는 십자가와 고문형구를 똑같이 취급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신이 영원히 잠들지 않고 지옥의 어두운 불길을 비추길 원한다면
먼저 형무소 건물에 높은 사라센식 아치를 세워야 합니다.' - 2011년 타 출판사
'세비야의 재판소에는 십자가와 고문용 형구가 나란히 있습니다.
하지만 신이 만약 지옥에 불을 붙여 영원히 타오르기를 원한다면
먼저 재판소 건물에서 회교식 높은 아치를 내몰아야 합니다.' - 2019년 이상 출판
이렇게 비교를 해보니 완독을 중도 포기한 이유 중에 매끄럽지 못한 번역도 한몫한 것 같아요.
작품의 이해도에 따라 번역의 수준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번역자분의 노력이 느껴졌습니다.
3대 기서의 완독을 목표로 하고 있는 분이라면 이 책으로 재도전에 꼭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