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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새 시대를 열어간 사람들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나에게 다산 정약용은 '국사'교과서의 등장인물로 기억되어왔다. 조선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로서 , <목민심서>와 <경세유표>,<흠흠신서>를 저술한 학자이며, 정조를 도와서 수원성을 신축할 때 거중기를 이용한 관리라는 것이 국사교과서의 정약용에 대한 서술이다. 아마 그 이상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정약용의 생각과 삶을 비추어볼 수 있는 글 한쪽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대한민국 교육을 통해서 우리가 얻은 바다. 한 개의 지식으로만 기억되어 시험을 위해서 소비되는 것.
나는 정약용이라는 인간을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통해서 느꼈다. 참 감동적이었다. 아들과 형님, 제자들에게 보내는 유배지의 다산이 뱉어내는 글들은 참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고난의 시절에도 굴절하지 않는 인간의 정신이 있었다. 사는 데 지치고 혼란스러워 삶을 허비할 때 정신을 추스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이제 이덕일 선생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읽고 나니 새삼 다산이라는 인간에 대하여 놀라는 바가 더 늘었다. 참으로 거대한 인간이 여기 있구나. 모든 시대를 건너 뛰어 진실 그 자체만으로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여기 있구나. 시대를 비껴가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친 당대의 대표자가 여기 있구나.
기막히게도 다산의 생애는 18이라는 숫자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는 1762년 (영조38년)에 태어났다. 22세가 되는 1783년 (정조7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 들어간다. 거기서 운명의 사람 정조를 만난다. 이후 18년간의 세월은 관리로서, 정치가로서 개혁군주인 정조와 함께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1800년 (정조24년)에 급서하자 그의 정치생활과 관료생활은 끝이 난다. 1801년 (순조1년)에 시작된 유배생활은 1818년 (순조 18년) 에 비로소 풀린다. 고향인 마재로 돌아와서 나머지 18년의 세월을 보낸 뒤에 1836년 (헌종2년)에 마재 자택에서 눈을 감는다.
다산의 생애를 읽을 수 있는 열쇠말을 찾으라면 나는 남인, 이익, 서학, 정조, 유배, 묘지명의 여섯을 들겠다. 먼저, 다산은 남인이었다. 노론의 반대당파이면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던 세력이 남인이었다. 또한 왕권을 강화해서 국가제도를 개혁애햐 한다는 노선을 걸었다. 여러면에서 남인은 노론의 반대당파이면서 국왕인 정조를 적극 도우려는 당파였다.
둘째, 다산은 성호이익의 학문을 배웠다. 기존의 성리학이 고루한 논리에 빠져 시대의 변화를 읽기 못할 때 성호 이익은 성리학의 틀을 어느정도 깨고 나갔다. 실학을 주창한 셈이다. 당시 기호지방의 남인들은 성호 이익의 학문을 받아들였는데, 다산도 성호의 학문을 자신의 공부에 기초로 삼았던 것이다. 그가 흑산도에 유배중인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 "우리가 능히 천지가 크고 일월이 밝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선생의 힘입니다"한 것만 보아도 다산은 성호를 새로운 학문의 개척자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다산은 정조의 개혁정치에 중요한 동반자였다. 정조가 가장 사랑한 신하이면서 정치적 동지로서 다산은 정조의 치적에 크게 기여했다. 수원성 설계를 다산이 맡은 일은 유명하다. 수언성은 정조의 개혁정치의 꿈을 담은 곳이다. 정조가 사라지면서 다산이 현실정치에 설 자리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노론의 살륙이었다. 반대당파를 철저히 분쇄하는 수법이 동원되었다.
넷째, 다산은 서학-천주학-을 받아들이고 배척하는 과정을 통해서 평생에 걸쳐서 화근이 될 일을 하게 된다. 당시에 '주자 근본주의'를 자기들의 사상으로 삼았던 노론일당에게 제사를 폐하고 성리학의 교조를 수정하려는 남인일파의 서학수용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이것은 정약용의 발목을 걸고 넘어지는 올무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남인당파를 궤멸시키고 정약용의 집안을 폐족으로 만들고 마는 원인이 되었다. 다산은 형-정약종-은 죽고, 매형-이승훈-도 사형당하며, 다산과 중형인 정약전은 오랜세월동안 유배형을 당한다.
다섯째, 18년간의 유배생활은 다산을 정치가나 관료가 아니라 대학자로 기억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기간에 이루어진 저술의 상당부분이 정치와 행정의 경험이 있고서야 가능했다는 점에서 20,30대의 관료생활이 다산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누가 그토록 국가의 행정체계와 사상체계를 세밀히 분석할 수 있었겠는가. 오로지 국가의 중심부와 정치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활동한 다산같은 사람만이 해낼 수 있었던 작업이었다.
여섯째, 다산이 지은 '묘지명'은 후대에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실록 같은 것이었다. 이른바 '사헌부의 계문과 옥안'에 기대어 자신과 자신의 당파가 평가받을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다산은 이가환, 권철신 같이 옥사한 이들의 묘지명과 더불어 자신의 '자찬묘지명'도 지었다. 마재로 돌아온 말년의 다산이 했던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묘지명을 저술하는 작업이었다. 50년, 100년 후를 내다본 시야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 묘지명이 있음으로 해서 다산의 입장에서 서술한 다산의 생애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참 다산이 근대적인 의식을 지닌 선비의 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그간에 알고 있던 다산의 삶은 유배생활 18년에 국한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나는 다른 자료를 거의 읽지 못했던 것이다. 이덕일 선생의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다산의 어린시절, 관료시절, 만년의 행적 등, 생애의 전모를 알 수 있게 되어다. 개인적으로는 다산의 곡산부사 시절의 행적들이 특히 인상깊었다. 당대에 그 같은 원칙을 갖추고 행동했던 지방관이 얼마나 되었을까. 참으로 백성을 귀하게 대접할 줄 아는 관리로서, 그는 배운대로 실천하는 선비였다. 다산은 어느 자리에 있던지 빛을 잃지 않았다. 결코 진흙 속에 묻히지 않을 진주 같은 사람. 다산을 마땅히 존경해야 할 증거들을 얻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참 고마운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