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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평전 - 정신의 비상
찰스 니콜 지음, 안기순 옮김 / 고즈윈 / 2007년 3월
평점 :
박홍규의 빈센트 반 고흐 전기의 제목은 <내 친구 빈센트>이다. 고흐가 늘 자기를 지칭하기를 빈센트라는 이름을 즐겨썼다는 것이 그 이유다. 고흐의 민중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제목 붙이기다. 나는 다빈치 평전의 독후감 제목을 내 친구 레오나르도라고 써 보았다. 위대한 르네상스인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그야말로 친구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비범한 천재인 다빈치를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뇌하는 평범한 생활인으로서 레오나르도를 느낄 수 있다.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부친 편지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밝혀놓은 것처럼, 레오나르도는 스스로 남긴 수십권의 노트를 통해서 자신의 정신세계를 우리가 엿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 책은 전기를 서술하는 데 레오나르도의 노트를 많이 참조했음을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도 레오나르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 사생아란 점. 여기에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어떤 정신적 배경이 있다. 예를 들자면 그의 성모자 그림에는 절대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둘째로 그는 르네상스 절정기의 이탈리아인이라는 사실. 셋째로 그는 신체적으로 대단히 준수한 용모를 지녔고,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는 점. 이 점에서 그는 미켈란젤로와 대비된다. 넷째로 그는 왼손잡이라는 사실. 다섯째로 그는 그림만 그린 사람이 아니라 음악과 수학, 해부학, 공학 등 다방면에 걸쳐서 엄청난 호기심과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점. 이런 면에서 레오나르도가 천재라는 것이다. 여섯째로 그는 사색적인 사람이었다는 점. 다혈질이라기보다는 고요히 생각하고 집중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여기서도 그는 미켈란젤로와 대비된다.
레오나르도의 아버지는 피렌체의 정치적 식민지라고 할 만한 도시인 빈치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직업은 공증인인데, 주로 귀족들의 문서를 취급하던 영향력있는 직업이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는법률적으로는 적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을 한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대의 상류층들의 결혼은 대부분 집안 간에 재산과 권력을 결합해서 서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거래의 성격이 강했다. 레오나르도는 어린시절에 사생아이지만 집안에서는 유일한 아들로서 (아버지의 본부인이 자식을 못 낳았기 때문) 할아버지나 삼촌 같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컸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렇게 하다가 레오나르도는 청소년 시기에 피렌체의 유명한 미술가인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도제로 들어가게 된다. 10년 가까운 도제시절을 보낸 뒤에 레오나르도는 독립해서 자신의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나 동성연애 사건인 살타렐리 연애사건을 겪고 난뒤 얼마 후에 피렌체를 떠나버린다. 이 때문에 레오나르도가 동성연애를 했다는 평가가 있는데,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런데 당대에는 젊은 미소년과의 동성애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거부감을 주지 않고 받아들여지는 사회적인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물론 법률적으로는 금지행위였다고 한다. 거기에 레오나르도가 걸려든 셈이다.
이어서 정착한 곳은 밀라노이다. 그곳은 절대권력자인 루도비코 스포르자의 궁정에 음악가로 고용된다. 이것이 좀 어울리지 않았는데, 알고보니 레오나르도는 수금(바이올린 비슷한 악기)를 잘 연주하는 연주가였다고 한다. 거기다 레오나르도는 스포르자에게 자신을 전쟁무기 제조의 전문가로 소개하는 유명한 소개장을 보냈다. 거기에 보면 레오나르도는 단순히 화가라기보다는 공학자에 더 어울릴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포르자의 궁정에서 있는 동안 레오나르도는 스포르자의 정부들의 초상화를 몇 점 그린다. 유명한 것이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이라고 하는 체칠리아 갈레아니의 초상화이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인데, 보고 있으면 놀랍다. 인물 속에 그 정신이 바로 느껴진다. 레오나르도는 스포르자의 궁정에서 20년 가까이를 보낸다. 거기서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기도 한다. 최후의 만찬은 당대의 그림과는 다른 점을 보여주는데, 그것을 글쓴이는 '역동적인 물결구도'라고 한다. 과연 해설을 보고 난 뒤 그림을 보니 최후의 만찬은 세 사람씩 모인 네 덩어리의 인물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인물들을 감싸고 있는 놀람의 표정들을 다빈치는 절묘하게 잡아내었다.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는 스포르자의 거대한 기마상을 만드는 엄청난 작업을 하기도 했는데, 결국에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점토상 상태에서 파괴되는 수모를 겪는다. 여기에는 당대의 국제정치의 상황이 작용한다. 프랑스 국왕이 이탈리아 정치에 개입하고, 여기에 로마교황과 피렌체의 메디치 집안, 밀라노의 스포르자 집안 사이의 치열한 암투 같은 것들에 의해서 서로 침략과 동맹을 계속하기도 한다.
이 와중에 등장하는 인물이 유명한 마키아벨리와 체사르 보르자다. 체사르 보르자는 당대 로마 교황의 사생아였는데, 상당히 냉혹한 권력자였다고 한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르 보르자를 모델로 하여 <군주론>이라는 정치학 책의 고전을 쓰게 된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 침입한 프랑스 국왕에 협조하게 되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부역죄 같은 것이다. 나중에 스포르자 집안이 다시 밀라노를 접수하자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를 탈출하여 피렌체로 돌아가기도 한다. 나중에 레오나르도는 체사르 보르자의 군사부문 책임자로 일하면서 당대의 전쟁터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느끼게 되는 것이다. 체사르 보르자와 인연은 잠시였다. 체사르 보르자의 아버지인 교황이 죽은 뒤 체사르 보르자는 몰락하게 되고, 레오나르도는 미리 그 낌새를 알아채고 체사르의 군사고문직을 그만둔다. 레오나르도는 결코 권력자에게 충성하지는 않았다. 자기 생존과 작품을 위해서 적절하게 권력자의 힘을 이용할 뿐이었다. 당대 예술가들의 입지를 감안할 때 현명한 태도였다고 생각한다.
레오나르도는 이후에 밀라노와 피렌체를 활동무대로 하면서 <모나리자>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기기도 했다. 피렌체에서는 마키아벨리와 함께 시정을 위해서 일을 하기도 했다. 또 미켈란젤로와는 시청벽의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서로 맞은 편에 나누어서 그리기도 했다. 둘 다 전쟁장면을 그리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두 위대한 화가가 서로 경쟁하면서 그리는 풍경은 당대에도 화젯거리였다고 한다. 그 때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보다 훨씬 젊은 후배였는데도, 불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생각을 속사포처럼 내뱉아버리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60세가 넘은 말년에 레오나르도는 프랑스로 넘어가서 프랑스 국왕에게 의탁한다. 이미 노년의 레오나르도는 위대한 화가일 뿐 아니라 현인으로도 이름이 나서 젊은 프랑스 국왕은 레오나르도를 환대했고, 이 위대한 예술가는 거기서 노년을 보내다가 편안하게 이승을 떠나게 된다. 이 때 나이가 68세였다. 가족은 없었고, 유산은 모두 가족이나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뜻밖에 레오나르도는 완성된 작품을 얼마 남기지 않았다.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 수태고지의 그림이나 몇 가지 초상화와 최후의 만찬 같은 작품을 빼면 대부분이 미완성작이거나 소실된 경우가 많다. 미켈란젤로와 비교하면 작품의 양에서 레오나르도는 현격하게 적다. 그런데도 레오나르도가 유명해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모나리자> 도난 사건 때문이라고 한다.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있던 모나리자를 이탈리아의 어떤 사람이 훔쳐서 가지고 갔다가 몇 년 뒤에 발각된 사건으로 <모나리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이 되었다고 한다. 도난사건을 통해서 <모나리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 되고 만 것이다. 더불어 작가인 레오나르도도 더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모나리자>를 훔친 사람이 애초에는 모나리자를 훔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문제의 그림이 훔쳐서 품에 넣어가기에는 너무 크다 보니, 바로 곁에 있던 작은 작품인 모나리자를 훔쳤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미술품 도난 사건으로는 희대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가 천재라는 증거로 자주 인용되는 것이 그의 노트다. 레오나르도는 그가 평소에 생각한 수많은 것들을 노트에 기록으로 남겼다. 거기에는 수학, 철학, 의학, 미술, 천문학, 군사공학, 문학 등과 같은 레오나르도의 다양한 관심사가 세심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다빈치는 메모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박지원이 말 위에서 붓으로 메모를 했다는 고사가 생각나는 구절이다. 다빈치노트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공학적인 설계그림과 인체해부 그림들이다. 다빈치는 새에 관심이 대단히 많았다고 한다. 사람이 날기 위해서 필요한 온갖 장치를 고안해보았고, 새의 비행방법을 세밀히 관찰하고 연구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헬리콥터와 낙하산의 원리를 발견했다. 또한 장갑차, 잠수함 같은 군사기술에 대해서도 이미 그것들이 실용화되기 전에 고민해보았다고 한다. 어쩌면 이런 고민이 가능했던 것도 그 시대가 르네상스시대라는 국제경쟁의 시대여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마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다양한 사상들과 기술들이 나온 것처럼 말이다. 다빈치는 또 수십번의 인체해부를 통해서 인체의 비밀에 대해서 탐구한 사람이다. 기본적으로는 미술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노트에 남아있는 인체해부 그림을 보면 레오나르도는 철저한 관찰자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이나 풍설로 말하는 것을 믿지 않고, 직접 확인해보고 실험해 보는 정신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물론 당대에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 한권의 가격은 요즘으로 치면 거의 자동차 가격 비슷한(너무 심한 표현인가. 컴퓨터 한대?) 정도로 아주 비싼 제품이었다. 때문에 집에 책을 소장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구나 전자제품을 들여놓을 때 생각하는 그 정도의 고민이 필요한 것이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1519년 프랑스에서 죽었다. 우리로 치면 조선 초기다. 조선 6대 임금인 단종이 즉위한 때가 1452년이다. 1519년은 중종 14년인데, 역사책을 보니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림들이 전격적으로 체포되어 사화가 일어난 해이다. 조광조는 죽을 때 38살이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가 죽을 때 68살이었으니 30살 차이가 난다. 이렇게 비교해서 보니 재미있다. 우리나라에서 레오나르도에 버금가는 예술가를 찾으라면 단원 김홍도나 공재 윤두서, 연암 박지원 같은 사람일까? 말을 좋아하고 그림도 많이 그렸다는 점에서는 공재 윤두서와 닮았고, 미술과 음악 모두에 능통했다는 점에서는 단원 김홍도를 닮았다. 메모광이라는 점에서는 연암 박지원을 좀 닮은 것 같다. 이탈리아라는 나라의 역사와 기질 모두가 한반도와 닮아 있다는 점에서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