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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천재들
김병기.신정일.이덕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사실 난 이 책을 이가환 때문에 읽게 되었다. 언젠가 읽었던 이덕일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 나온 이가환에 대한 언급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읽은 내용은 모두 외워 버린다는 희대의 천재 이가환의 이야기는 누가 들어도 신기할 법하다. 과연 내용을 읽어보니 이가환은 타고난 천재였다. 당대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책을 읽었고, 동시에 거의 모든 책의 내용을 외우고 있었다니 가히 인간 컴퓨터였다. 역시 천재로 소문났던 정약용이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의 천재가 이가환이었다. 그러나 이가환의 그러한 박식함으로도 그 시대의 한계를 돌파하기에는 노론이 장악하고 있는 현실정치의 벽이 너무 높았다. 기호남인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정조의 죽음이후에 정약용을 비롯하여 이가환, 권철신, 정약전, 이승훈들은 죽거나 귀양가는 불행을 당한다. 이가환은 노론에 정면으로 대항한 이잠의 후손이라는 이유,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정조 사후 노론의 일당독재 시기에 죽임을 당한다. 향년 61세였다.
이가환 말고도 새로 알게 된 인물들이 있고, 인물들의 숨겨진 이야기들도 있다. 이벽에 대한 글과 정철에 대한 글이 인상적이었다. 역사책에서는 천주교를 전교한 인물 정도로 여겨지는 이벽이나 이승훈 같은 인물들이 당대 지식인들의 세계에서는 대단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 특히 이벽은 비범한 인물로 나온다. 이벽의 조상은 소현세자가 중국에 볼모로 잡혀가 있을 때 청나라에서 세자를 섬기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 때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천주교 관계 서적들이 이벽의 집안에 전승되고 있었던 것을 이벽이 스스로 읽고 '자생적인 천주교인'이 된 것이다. 역사상 신부의 전교없이 자생적으로 천주교인이 된 사례는 이벽의 경우가 유일하다고 한다. 이벽은 그렇게 스스로 천주교인이 되어서 이승훈을 중국에 보내서 천주교회당에서 영세를 받도록 한다. 그렇게 해서 이벽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조직을 꾸리고 이끌어간다. 이벽은 정약용 형제의 큰 형인 정약현의 처남이다. 정약용과는 사돈관계가 된다. 유명한 천진암 강학회를 했을 때 참가했던 선비들의 나이는 권철신 44살, 이벽 26살, 이승훈 24살, 정약전 22살, 정약종 20살, 정약용 18살, 이총억 16살이었다고 한다. 성호 이익의 학문을 추종하던 기호 남인의 자제들이 이벽이라는 인물 때문에 대부분 천주교라는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나중에 이것이 씨앗이 되어 이 모임에 참가했던 선비들 대부분이 죽거나 귀양가는 처참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 정약용은 <녹암 권철신 묘지명>에서 "나는 이벽을 추종하였고, 나의 형 정약전은 아주 일찍부터 이벽을 추종하였다. 뿐만 아니라 권일신은 열성적으로 이벽을 추종하였으며, 이가환 역시 이벽을 추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약용이 이벽을 따르고 존경했던 이야기들이 여러 곳에 나온다. 결국 이벽은 을사박해 후 32살의 나이로 죽게 된다. 문중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신앙을 지키려던 이벽은 결국 단식 14일 만에 탈진한 채 숨을 거둔다. 1785년 봄의 일이다. 경주 이씨 문중과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 젊은 아들 이벽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줄다리기는 옛날일이 아니고 요즈음의 일처럼 느껴진다.
이 책에는 모두 열 세 사람의 천재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삼국시대 인물로는 최치원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이규보와 지눌,서희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김시습, 이이, 정철, 장영실, 유득공, 이가환이 있고, 구한말의 사람으로는 매천 황현과 이상설이 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분량이지만 각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이해하기에는 적절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좀 더 깊이있게 알고 싶은 사람은 해당 위인의 전기를 읽어보면 될 일이다. 나는 몇 해 전에 나온 <김시습 평전>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니 열 세 사람 중에 전기가 책으로 나온 것이 김시습이나 율곡 이이 정도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용으로 각색한 전기는 많아도 정작 제대로 된 전기는 드문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나마 <김시습 평전> 같은 것이 나온 것도 어찌 보면 이 분야의 좋은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