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12. + 짜증나는 녀석과의 짜증나는 계약
슬비와 야자시간까지 함께 떠들며 공부했다. 야자시간이 끝나고 헤어지면서 슬비와 전화번호도 교환하고(야호!) 내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서 계속 슬비 전화번호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전화번호를 보고 있노라면 칠판에 저절로 파도가 그려졌다. 신기하게도 그 파도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맡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는 냄새였다.
하지만 아직은 그걸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보이저인가 뭐신가 하는 녀석에게 진 빚이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 녀석 때문에 나와 슬비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선 그 채무관계를 정리해야했다. 나는 빚지고는 못 사는 인생이었으니까.
푹신한 침대에 앉아서 그 녀석을 불러냈다.
“야, 나와 봐.”
곧이어 안경에서 무지갯빛 광선이 형체를 이루더니 그녀석이 나왔다. 참 작았다
“왜? 선우.”
난 그 상냥한 목소리에 주눅이 들었다. 목소리가 정말로 오빠를 닮았다.
“저기.”
“무슨 일 있어?”
“보이저, 보이저가 니 이름이야?”
“한 글자 틀렸어. 내 이름은 보이더 디르 픽 메르타니야.”
“그럼 보이더라 부를께.”
그녀는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아마 주인이란 놈에게 처음으로 자기 이름이라는 것을 들으니 놀랬겠지.
“응. 그렇게 하도록 해!”
보이더의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근데 왜?”
“아, 그 있잖아. 니, 니가 말한 그 계약이라는 거 말야.”
나는 말을 더듬거렸다.
“응.”
“하자.”
“... 뭐?”
“하자고.”
“계약을?”
“응.”
“정말?”
얘 의심병 걸렸나?
“그렇대두! 자, 빨랑빨랑 해버리자고. 나 자야 되니까!”
힘주어서 말했다.
그러자 보이더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환한 미소를 만면에 띠고 “알았어!”라 말했다. 아 또 저런 오빠 같은 웃음! 보기 싫어 죽겠다.
“잠시만 손바닥 좀 줘볼래?”
“손바닥?”
나는 손바닥을 보이더 앞에 내놓았다. 보이더는 내 손바닥 위에 자기 손바닥을 올려놓았다가 조금 위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 사이에 무지갯빛 구체가 생기더니 Ł-ŊÆΓ란 무슨 이상한 글자가 그걸 감싸고돌았다. 그리고 그건 보이더에게 씌워졌다. 이윽고 작디작은 쭉쭉 빵빵은 어디가고 나보다 더 큰 쭉쭉빵빵이 나를 보고 서있었다. 헉, 나는 놀래서 그만 엉덩방아를 찍고 말았다. 나보다 더 조그마했던 녀석이 순식간에 저렇게 커지다니!
“뭐.. 여? 너 왜 이렇게 커져버렸냐?”
보이더는 호탕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놀랬지?”
“.....놀라는 게 당연하지. 나보다 작았던 녀석이 갑자기 커져봐라, 안 놀라는가.”
보이더는 한 번 더 웃으며 말했다.
“푸핫, 이것도 워먼덱스의 기능이야. 그 별에 사는 원주민과의 계약이 끝나면 계약한 사람만큼 커지게 되어있거든.”
보이더는 키가 나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원주민과 계약하면 계약한 사람의 키만큼 커진다매.. 이녀석 거짓말 한건가?) 난 왠지 샘이 나서 입을 비죽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나보다 커지는 법이 어디 있어!”
"어쩔 수 없잖아. 워먼덱스가 그렇게 했는걸."
"...."
“아이고, 요것 보소! 완전 귀여워 가지고. 난 키가 조금 작은 사람이 좋더라? 귀여우니까,”
보이더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정말, 계약해 줬더니 이 녀석이 기어오르기 시작하네? 나는 그녀의 손을 치며 말했다.
“만지지마! 누가 너하고 친하게 지내겠대? 계약만 해준다 했지.”
보이더는 어구, 귀엽게 볼 부풀린 거 봐라? 하면서 내 머리를 ‘또’ 문질렀다. 아이, 이녀석 진짜! 난 화를 냈다. 손 안 내려놔? 니가 나보다 더 커지니까 막 대하는 거지? 그렇지? 보이더는 미소 지으며 ‘아니야~ 너 귀여워서 그런 건데?’라고 말했다. 나는 보이더를 째려보기만 했다. 에효, 이 녀석을 어찌하나.
나를 보고 웃던 보이더는 분홍빛 은하수를 닮은 눈을 나와 맞추며 나에게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탁 치고는 다시 붙잡았다.
“아무튼 계약은 해 줬으니까 됐지? 너 또 내 말 안 듣기만 해봐라. 안경에서 내쫓아 버릴 꺼다.”
보이더는 웃었다. 그리고 무지갯빛 광선속에 몸을 숨긴 채 안경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하트 무늬의 쿠션을 집어서 침대 위로 던져버리고, 나도 그 위로 드러누웠다. 이제야 들어갔네. 한숨을 쉬었다.
미치겠다. 몸매도 성격도 다 오빠 녀석을 쏙 빼닮았다. 오빠라는 녀석과 살 때도 스트레스 많이 받았는데, 보이더 녀석은 또 어떻게 견디라고 그러는지. 짜증이 팍 난다. 나에게 이런 종류의 사람은 정말 무리라고!
그럼 어쩌겠냐. 이미 계약해 버렸는걸. 이렇게 된 이상 친하게 지내는 수밖에 없잖아. 그래. 최소한의 친절은 베풀어야 되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제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눈엣가시 같은 그 녀석을 마주봐야된다. 외면해선 안 된다.
앞으로의 생활에 나는 한숨을 보태며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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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제 소설을 재밌게 봐주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더욱 더 건필에 힘쓰는 제가 되겠습니다.
사랑하고, 미안합니다.